▲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융이 말한다. 꿈의 상징은 그 꿈을 꾼 이를 떠나서는 풀어낼 수 없다고. 확정된 단순한 해석은 꿈을 오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현주 목사의 꿈 일기>를 읽다가 당연한 걸 다시 배웠다. 그것은 사람이 지혜로우면 흉몽이라고 느껴질 만한 것도 스승이 되는구나, 하는 거였다.
“꿈에 한 젊은이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여기 길이 없어요, 사방이 철망으로 막혀 있어요’ 하고 말했다.” 이런 불안하고 섬뜩한 꿈을 두고 이현주 목사는 이렇게 해몽한다. “그렇게 그가 길을 가르쳐 주었다.”
“꿈은 모두 길몽입니다. 흉몽은 없어요. 있다면 나쁜 꿈을 꾸었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죠.” 환갑을 맞아 차곡차곡 꿈 일기를 써내려 갔던 이현주 목사의 말이다.
그런데 왜 흉몽이 없을까? 꿈보다 해몽이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무슨 좋은 일이 없을까, 들뜨는 이는 기분 나빠지는 꿈이 찾아오면 하루 종일 불안해한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이 저 무의식 밑바닥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몽학 선생이라고 보면 흉몽은 없다.
법과 관습에 익숙한 의식은 통제에 익숙하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앓고 있고, 효율적이고 계산적이다. 그러니 성공한 사람일수록 억압이 많고,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편견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꿈은 그런 억압과 편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여러 거울 중의 하나다. 이현주 목사는 꿈에서 세상에 한 송이뿐이라는 꽃을 본다. 그런데 그 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그 꽃은 바로 이현주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가 고백한다. 볼품없다고 느낀 그것이 바로 편견이고 선입견이었다고.
“더 화려하게! 더 능력 있게, 보다 많은 이윤을!”이라는 편견에서 그 꽃은 볼품없는 꽃이었지만 생명의 관점에서 그 꽃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꽃이고, 세상의 모든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는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 그 자체다. 모든 존재는 고유한 존재면서 동시에 세계 그 자체다.
우리는 무명(無明)에 가려 있는 진리고, 세계인 줄 모르는 세계다. 왜 무명이 가리는가? 이 목사를 따라가다 보면 생이 꿈인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그도 평범한 우리처럼 폭군을 만나 도망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젊은 날의 군대로 되돌아가 고생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하차역을 놓치고 안절부절못하기도 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가 말한다.
“아직, 내 꿈속의 나는 자기가 지금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허둥지둥한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것이 어떤 일이든, 착실하게 겪으면서 즐길 수 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쩌면 모든 생은 꿈인 줄 모르는 꿈이 아닐까? 꿈인 줄 몰라 욕심을 부리고, 욕심을 부리니 즐기는 대신 집착하고, 여유 있게 관조하는 법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