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 황석영의 <손님>이 연극으로 다시 태어난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로 동아연극작품상과 연출상을 수상한 중견연출가 윤광진이 연출을 맡았다. 18m나 되는 거대한, 그러나 끊어진 교각으로 드러나는 윤광진 연출의 무대는 상징적이다. 그 다리는 전쟁의 흔적이고 동시에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곪을 대로 곪아있는 우리들의 깊은 상처이기도 하다. <손님>의 무대는 지난 50여년간 남과 북 모두가 감추고 왜곡해왔던 우리의 참혹한 비극을 연극적으로 승화시켜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은 50여년 전에 일어났던 한순간의 참상이 아니라 지금껏 풀지 못한 비극의 아킬레스건인 것이다.
윤광진의 물음이 진지하다. “대대로 오순도순 살아오던 한 마을 사람들이 왜 갑자기 서로를 증오하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돌렸을까요? 왜 서로를 도랑에, 방공호에, 창고에 몰아놓고 학살하는 무서운 야수로 변했을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집요하게 지금까지 쫓아다니는 그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조차 하지 못한 것일까요? … 바로 손님들 때문입니다. 아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손님입니다.”
‘손님’들은 누구인가? 황석영은 그 손님을 주체적 근대화에 실패한 우리에게 외부에서 이식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이를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어디 기독교의 문제고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이겠는가? 문제는 이들 정신과 이념들을 주인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데 있다. 그러니까 주체적 근대화에 실패한 우리는 손님을 맞아 손님을 대접하고 손님에게 배우고 손님을 돌려보낸 당당한 주인이 아니라 손님에게 아예 주인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손님으로 어정쩡한 삶을 살게 된 기막힌 인생들인 것이다.
우리는 왜 여전히 손님인가? 삶보다 이념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실상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맥을 못추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허위의식 속에서 증오와 반목만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새 세상까지 미운 게 따라다녀야 되겠습니까? 깨끗이 씻고 가셔야죠.” 망자에게 던진 류요섭 목사의 말처럼 새로운 세상은 삶이 허위의식을 녹여내는 세상이며, 갈등 없는 세상이라기보다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동되는 세상이며, 사랑이 증오를 감싸는 세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맺혔고 어디가 쏠려 있는지 성찰하며 해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 없이 현재 없고, 기억이 없이 미래가 없다. 죽은 자가 편하지 않으면 산 자도 편할 리 없다. <손님>은 우리 역사의 아픈 곳을 짚어주고 맺힌 곳을 풀어주는 한판 굿판이 될 것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