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그 작품이 설치되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시끄러운가. 이 문제를 두고 미술계는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저항하고 있다. 미술인회의, 민족미술협회, 한국미술협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화연대, 문화우리 등은 청계광장 공공미술작품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최소한의 문화적 공론화 과정도 없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면서 클래스 올덴버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기로 한 과정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처음에 밀실거래식으로 기획단계에서 관여한 서울시는 올덴버그의 선정방침이 알려지면서 말썽이 일자 사업의 주체를 서울문화재단과 KT로 옮겼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백40만달러라는 거액을 주고 KT에서 구입해 서울시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서울시의 행정처리 과정이 여전히 70~80년대의 리더십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밀실에서 결정하고,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사람을 따로 만드는 책임전가까지. 지금 이명박 시장은 집권이 유력한 대권후보로 꼽힌다. KT가 아니라도 어느 기업이 ‘기증(?) 제의’을 거절할 수 있을까.
설치작품은 어디에 어떻게 설치되느냐가 생명이다. 청계천을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작가, 아니 서울땅 그 어디도 밟아본 적이 없는 작가가 미국작업실에서 구상한 작품이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문가의 작품이니 작품 그 자체는 기본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6백년 고도, 서울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인도양 조개를 디자인한 작품 제목 스프링도 영어의 다중의미에서 착안한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표현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고, 혼이고, 삶이다. 6백년 고도 서울이 복원한 청계천의 혼을 영어적 세계 속에 담아야 하는가.
작품이 상품임에도 작품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거기에 혼이 실리고, 세계관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땅을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으니 애정이 있을 리 없으면서 비싼 대가만을 요구하는 작가와, 유명하다는 이유로 작품을 맡긴 쪽은 도대체 어떤 정신적 교감이 있었을까? 그 씁쓸한 교류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작품은 또 무엇을 보여줄지.
광활한 만주벌판에 광개토왕비는 잘 어울린다. 그러나 거기에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들어선다면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작품은 공간을 가리니까 작품인 것이다. 좋다고 다 어디에서나 좋은 작품인 것은 아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