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하나는 역시 2월10일 중앙지법의 판결로 설훈씨가 제기한 이회창 캠프 20만달러 수수설에 관한 결정이다. 핵심 내용은 설훈씨의 폭로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윤여준씨와 한나라당에 1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회창씨는 2002년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고, 설훈씨는 집권당의 잘나가는 국회의원이었다.
이 판결들이 중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의 보도행위를 이제부터는 사실을 다룬 기사인가 아니면 의견을 표현하는 칼럼인가의 기준으로 나눠 보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취재원과 언론인 양자 모두에게 과거보다는 훨씬 세밀한 행위기준을 요구한다. 특히 사실기사의 경우 철저한 검증과정을 투명하게 제시해야 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의견을 표현하는 경우는 반론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이 판결의 두 번째 의미는 정부와 언론의 갈등관계를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된 점이다. 김대중 정부 이래 진보와 보수의 이념대결이 정권의 재창출과 뒤섞이면서 한국의 정치와 언론계는 극심한 가치의 혼란 상태를 겪어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판결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과 이념을 분리시키는 효과도 기대하게 한다. 물론 이러한 긍정적 변화로 이어지려면 신문과 방송, 인터넷 매체들이 사실 속에 이념과 의견을 섞어 넣거나 이념의 색안경으로 사실을 포장해온 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훈씨 관련 판결은 한국의 정치보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의미다. 우선 정치인들이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정치공작적 정보조작 행위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의지다. 청와대까지 개입해 집권당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미디어 공작을 벌였고, 그 결과 야당 대통령후보를 음해했던 이 사건은 21세기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러나 이 판결을 보도하는 언론사들은 더 중요한 문제를 덮고 지나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 판결의 더 큰 당사자는 설훈씨가 제기한 주장을 검증하지 않고 전국민에게 퍼뜨린 신문과 방송사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론사들은 설훈씨를 비난하고 정권을 비판하는 선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정치조작에 관한 보도관행을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하고 자신들의 잘못 또한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거짓말하는 정치인을 검증하는 일은 민주사회를 가능케 하는 가장 기초적인 언론의 임무다. 조작된 정보를 확성기처럼 증폭시키는 언론은 선동의 도구일 뿐이다. 이번 판결은 그러한 인식과 관행의 변화를 강력히 촉구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