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를 앞두고 TK민심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보수 세력의 텃밭이자 심장이었던 TK였다. 하지만 최근 TK 기류는 역사가 결코 일방향으로 고정된 것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예고하고 있다. TK 민심이 보수 정치세력을 향해서만 일방적 표몰이를 하는 현상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최준필 기자
문재인 대통령 인기를 등에 업고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강한 지지세가 전국적으로 불고 있지만 이 기세가 TK까지 들이닥칠 것이란 예상을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TK에서만큼은 ‘한국당=당선’이라는 공식이 적용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 선거에서 한국당 후보가 민주당 후보를 예전처럼 압도적으로 누르지 못하고 있다. 전례가 없었던 ‘승부다운 승부’가 예상되는 것이다. 4년 전인 지난 6회 지방선거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후보는 새누리당 권영진 후보(55.95%)에 패했지만, 득표율 40.33%를 기록해 선전했다. 대구가 더는 넘지 못할 산이 아님을 보여준 바 있다.
자유한국당이 TK에서 흔들리는 것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민주당 현역 국회의원이 2명이나 있는 대구시에서는 이들 민주당 의원 지역구(대구 수성구·북구)에서 한국당과 민주당 구청장 후보들 간 박빙승부가 벌어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경북에서는 공천에서 탈락한 무소속 후보의 반란도 상당수 지역에서 감지되고 있다. 한국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TK 지역 3선 도전 단체장에 대한 교체지수를 적용, 정당 지지도보다 현역 단체장 개인 지지도가 낮은 단체장에 대해서는 공천장을 주지 않았다. 이는 비공개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됐는데 현역 단체장들은 이에 강력 반발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대구 달성군과 경북 안동·예천·경주·울진 등 5곳의 시장·군수들이 이에 해당된다.
공천에서 배제된 이들 단체장들은 “국회의원들이 지난 8년간의 업적이나 주민들의 선호도는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천을 주지 않았다”며 공천권을 쥔 지역 국회의원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들 무소속 후보들은 지난 8년간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당 공천자들을 앞서나가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TK 곳곳에서 한국당 후보들을 제치는 무소속 돌풍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TK 맹주라 불리는 한국당은 겉으로는 느긋하다.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지만 “괜찮아”를 연발하는 모습이다. 한국당이 다리를 쭉 뻗고 있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대구시 일부 기초단체의 경우, 민주당이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뒤집을 만큼의 전세는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대구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민주당 정치인인 김부겸 장관이 ‘신분적 제약’ 탓에 민주당 바람을 일으키는 선거운동을 대놓고 할 수 없다.
또 문재인 정부의 TK홀대론을 확 펼쳐 보이면 선거 막판에 보수층이 단숨에 결집하리라는 것이 한국당 내부 판단이다. 실제로 문재인 출범 1년이 지난 5월 기준으로 현 정부 주요 부처 1급 인사 71명 가운데 TK 출신은 12명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고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 4개 기관에는 TK 출신 1급 인사가 단 한 명도 없다.
공공기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추경호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대구 달성)이 공기업 35곳, 준정부기관 93곳, 기타 210곳 등 공공기관 338곳을 전수조사한 결과, 5월 17일 기준으로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공공기관장 152명 중 약 23%인 35명이 서울, 경기 출신이었고 호남과 PK가 각각 34명(22.3%), 32명(21%)으로 그 뒤를 이었고 충청은 26명(17%)이었다. 하지만 대구 출신은 3명(1.9%), 경북 출신은 14명(9.2%)에 그쳤다. TK 출신을 모두 더해도 호남의 절반에 불과했다. 한국당은 이런 데이터를 축적해놓고 있으며 선거전에서 TK지역민들에게 호소할 경우, 텃밭 지키기는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무소속 돌풍에 대해서도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다. 무소속으로 나온 후보들이 선거에서 승리하더라도 다시 한국당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 한 TK 현역의원은 “TK만큼은 자유한국당의 보루다. 민심에 변화가 있다고 자꾸 얘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제 다녀보면 사실이 아니다. 바닥을 훑으며 주민들을 만나면 아직 일편단심 한국당”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현실은 그리 녹록지 못하다. TK 지역은 공천에서부터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 속속 연출됐다. 후보를 못 구해 난리를 쳤던 대구시장 선거에서 3명의 민주당 후보가 나서 치열한 경선을 치렀는가 하면, 문재인 대선 캠프에서 상당한 공을 세우고 청와대로 들어갔던 오중기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이 민주당 경북도지사 후보로 나섰다. 오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실세로 불리는 임종석 비서실장, 최재성 전 의원 등과 친밀한 관계로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의 TK유세에서 큰 도움이 됐다.
이런 변화 기류는 민주당 사람들이 “TK도 해볼 만한 곳”이라고 느끼는 계기를 만들고 있고, 결국 민주당 사람들이 예전에 외면했던 영남을 다시 쳐다보게 만드는 연쇄작용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지방선거와 2년 뒤 치러지는 총선이 직결돼 있다고 보는 관측이 많은 만큼 이번에 뿌린 씨앗이 2년 뒤 총선에서는 큰 파괴력을 지닐 것이라는 시각이 나타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TK를 비롯한 영남에서 ‘유의미한 민심 변화’가 감지된다면 더 많은 민주당 후보들이 TK 등 한국당 텃밭으로 호미를 들고 들어올 곳이고, 한국당 내 국회의원들은 결국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농토 개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TK에서 예전처럼 한국당 후보 주도의 일방적 게임이 사라지고 곳곳에서 제대로 된 승부가 펼쳐질 경우, 한국당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빅텐트’ 구축 목소리가 다시 커질 수밖에 없다. 야권의 모든 일꾼들을 빅텐트에 모여들게 하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민주당 일방 독주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하는 정계 대개편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3지대인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국회의원들은 성향에 따라 한국당으로, 민주당으로 연쇄 이탈을 하며 다당제 구도가 사라지고 예전의 양당 체제가 재구축될 전망이다.
이미 예고편이 시작됐다는 의견도 많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 간의 설전이 사라졌다는 것이 보수 대통합을 위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근거라는 것이다. 홍준표 유승민 대표를 모두 잘 아는 한국당 한 관계자는 “남북문제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에 날선 비판을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서로에게 공격을 자제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실제로는 코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서로가 공간을 남겨두기 시작했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며 “정치는 정치인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을 모으고 이 세력을 통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지방선거 이후 보수를 대표하는 두 정치인이 결국 무언가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