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
“사려 깊지 못한 행동으로 공직자들과 국민에게 많은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3월 15일 이 해찬 전 국무총리가 3·1절 골프파문에 대해 책임지고 물러나며 읽은 이임사의 한 대목이다. 이 총리는 골프가 빌미가 돼 권력을 내놔야 했던 첫 번째 총리로 남게 됐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20일 이번에는 이명박 서울시장이 테니스 때문에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직자로서 보다 엄격하게 처신했어야 하는데 사려 깊지 못했던 점에 대해 시민들께 깊이 사과드린다.” 이 시장의 테니스 파문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여당의 맞불 작전 탓인지 ‘황제 테니스’로 불리며 이 전 총리의 ‘황제 골프’와 함께 올 3월 가장 주목을 끄는 정치스캔들로 떠올랐다.
이해찬 전 총리와 이명박 시장의 사과문을 나란히 제시한 이유는 한눈에 드러나는 표현의 비슷함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사려가 깊지 못해서” 빚어진 잘못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은 정치성향이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성장배경은 민주운동가와 대기업 CEO로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잘못을 사과하는 방식은 신기하게도 일치한다.
무엇이 이들의 사과문안을 이처럼 똑같이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비서들이 찾아준 과거 공직자들의 사과성명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벤트에서는 권력자가 공개적으로 사과한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이유는 대체로 주목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 정치인들의 공개적인 사과에서는 그동안 사과의 이유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고착된 우리의 공직문화이기도 하다.
이번 황제 스포츠 사태는 이러한 공직문화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개선하는 계기가 돼야겠다. 이해찬 전 총리나 이명박 시장은 사려가 깊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한번이라도 골프와 테니스 행사의 성격과 즐기는 방식을 진지하게 반성했더라면 미디어가 보도하듯이 ‘황제적’ 방식으로 운동을 즐겼을 것으로는 생각하기 어렵다. 한번이라도 ‘사려 깊게’ 생각했다면 네 번씩 같은 사과를 되풀이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황제 골프나 황제 테니스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광범위하게 공직사회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문화가 바뀌려면 결국 사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문제가 제기된 공직자는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또 어떻게 문제를 제도적으로 고쳐나갈 것인지도 약속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 또한 거물 정치인의 흠집을 파헤치는 수준에 멈춰서는 곤란하다. 권력자의 도덕적 해이 문제는 항상 감시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언론의 기능은 마녀사냥이 아니다. 마녀사냥으로 그치면 황제 골프의 싹은 또 다른 모습으로 자라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