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금지령을 내린 바로 사흘 뒤인 26일에 청와대의 한 비서관이 대기업 임원과 어울려 골프를 쳤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그날의 친목골프에 나온 대기업 임원은 요즘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회사의 계열사 이사였다. 그날의 골프회동 사실이 신문·방송에 터져 나오자 맨 먼저 청와대 대변인이 골프 친 비서관을 감싸고 나섰다. “민정수석실 조사결과 친목성격으로 직무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 취임한 대통령 정무 특별보좌관이 골프를 금지한 청렴위의 방침은 ‘정무적 판단 없이 이루어진 한건주의’라고 비판했다. 그 이튿날에는 민정수석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다들 혼란스러워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일이 이쯤되자 난처해진 것은 골프금지령을 내렸던 국가청렴위원회였다.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하게 꿰고 있는 청와대의 내로라하는 참모들이 일제히 나서서 골프 친 비서관을 감쌌기 때문이다. 좀 잘해 보자고 내놓은 골프 금지령이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어쨌든 청와대 비서관의 주말 골프로 서슬퍼런 금지령은 ‘백문선의 헛문서’가 되고 말았다. ‘모든 공직자는 직무 관련자와 골프를 함께 해서는 안된다’던 기준이 ‘소관업무와 관련해 현실적이고 직접적·사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민간인’으로 바뀐 것이다. 명분 약한 후퇴다 보니 동원된 낱말들도 현실적인 직무니 잠재적인 직무니 해서 구차스러운 데다 간접적인 영향력이나 공적인 목적을 위한 회동 등의 표현도 군색하기 짝이 없다.
결국 이 금지령을 어긴 청와대 비서관은 여러 실세들이 감싸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제출했고 사표는 곧 수리되었다. 청와대 참모들이 한마디 했다고 해서 금방 물러 선 청렴위원회도 딱하지만 무슨 말썽이 터질 때마다 청와대 비서관들의 이름 석 자가 오르내리는 것도 딱한 노릇이다. 요즘 몇 달 동안만 해도 국가안보회의 기밀문서가 유출된 사건이 있었고 청와대 행정관이 자기 부인을 목졸라 죽인 엽기적인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실은 뒤늦게 기강을 잡겠다고 나섰다. 자세를 가다듬어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다짐은 그전에도 있었다. 대통령의 오른팔이니 왼팔이니 하는 사람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검찰에 불려다니고 더러는 감옥살이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자 비서실장이 직원조회에서 도덕적 우월성과 사명의식을 강조한 것이 작년 5월이었다. 기강확립도 좋고 재발방지도 좋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옥좌(玉座)를 방패로 삼고 ‘곤룡의 소매’를 갑옷으로 삼아 누리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권세를 민주화에 기여한 대가로 주어진 당연한 권리로 아는 몇몇 측근 인사들의 그릇된 특권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