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
그러나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유권자들이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다. 물질적 피해는 개별 국민 입장에서 계량할 수 없다. 또 정치가 그런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따져보면 병풍은 온 국민이 사기를 당한 사건이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병풍은 덜 정비된 한국 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을 철저하게 정략적으로 활용한 폭로공작의 성공사례다.
병풍을 성공사례라고 말하는 이유는 대법원 유죄판결 이후에도 사실상 이 문제를 책임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온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한국 민주주의를 농락했어도 결국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나갔다는 뜻이다.
우리의 이러한 상황은 지난 3월 있었던 일본 사례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3월 31일 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 대표 마에하라 세이지 씨가 갑자기 사임을 발표했다. 한국 정당으로 하면 사무총장격인 간사장과 원내대표격인 국회대책위원장도 함께 사의를 표했다. 이유는 같은 당의 한 의원이 자민당 간사장 아들의 자금수수의혹을 폭로했으나 제시된 근거인 이메일이 날조됐다고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대통령 선거전에서 부시 대통령의 병적기록을 위조한 자료를 그대로 방송한 사례가 있었다. 방송 직후 전문가들의 검증 결과 증거가 조작된 사실이 드러나자 20년 넘게 CBS 저녁뉴스를 진행하던 댄 래더는 책임을 지고 앵커자리를 떠났다. 담당 프로듀서와 제작 책임자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물론이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폭로 공작의 성수기가 돌아왔다. 김한길 원내대표가 예고하고 의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한 이명박 시장 별장파티 의혹은 아마도 전초전에 불과할 것이다. 선거일이 다가오고 지지율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폭로공작의 유혹도 커갈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병풍사건의 또 다른 가해자는 신문과 방송사들이다. 사실 검증보다 주장 저널리즘이 본업인 인터넷 매체들의 잘못도 심각하다. 그러나 어느 신문에서도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기사를 접해본 기억이 없다. 어느 방송의 탐사보도나 미디어 비평프로그램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정치인의 주장들을 그대로 옮긴 잘못을 성찰하는 내용을 보도한 적이 없다.
토머스 제퍼슨을 빌지 않더라도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하려면 정부나 정당보다도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권력이 총구나 금고가 아니라 유권자들의 생각에서 나오려면 생각의 바탕이 되는 정보가 건실해야하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병풍 등 일련의 폭로공작에 대한 탐사보도가 필요하다. 이는 언론이 민주제도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기여할 수 있는 핵심적 과제다. 탐사보도에서는 특히 누가 폭로공작을 기획했고, 어떠한 조직이 참여했으며, 어떻게 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러면 허위공작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던 신문이나 방송사는 조금이나마 허물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더욱 중요한 소득은 그러한 작업을 통해 폭로공작이 시도되는 토양 자체가 없어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