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혼자 있는 시간, 당연히 외로운 시간이 아니다. 외로운 시간은 혼자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어 불안한 시간이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그 자체로 충만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은 잠금장치가 고장난 수도꼭지의 물처럼 막무가내로 쏟아져 나오는 내 에너지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 혼자 있는 시간은 욕망덩어리인 내 인생의 정신을 찾아주는 시간이고 그럼으로써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때로는 꼼꼼하게 때로는 고독하게 살피는 시간이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혼자 있을 때가 많지만 이상하게도 달라이라마가 권하는 ‘혼자 있는 시간’은 가지기 힘들다. 많은 경우 그건 TV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현대인은 TV를 앞에 모신 부처님들이라고. 얼마 전에 미국에서는 TV 끄기 운동이 일어나 주목을 끌었다. 미국인들의 TV시청 관련 통계가 나왔는데 재미있다는 차원을 넘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구당 매일 TV가 켜져 있는 시간 7시간 40분. 한 사람이 매일 TV를 시청하는 평균시간은 4시간 이상. 최근 3일간 TV를 보다가 잠든 비율이 4명 중 1명꼴. 2∼17세의 1주일 평균 TV시청 시간은 19시간 40분. 18세가 되기까지 미국의 청소년이 TV에서 살인장면을 보게 되는 건수가 1만6천건.
그런데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일까? 우리는 좋은 프로그램도 많은 TV를 바보상자라고 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혼자일 때가 많은 도시인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TV라면 그건 단절적 삶이고, 가난한 삶이고, 게으른 삶이고, 황폐한 삶이다. 사실 TV로 상징화되는 현대기술문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단절을 부추긴다. 거대한 돈이 만든 기술권력은 돈만 있으면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노래를 부른다. 경비가 있는 아파트, TV, 컴퓨터, 냉장고, 세탁기….
TV는 얼굴을 마주 보며 도란도란, 티격태격 함께 살아가는 일을 도둑질했고, 가상현실을 현실로 바꿔낸 컴퓨터는 세계를 전도해 버렸다. 그러니 사이버 관계는 사이비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장시간 보관이 가능한 냉장고는 이웃과 나눠먹는 일을 도둑질했고, 단추 하나면 말라서 나오는 세탁기는 우리의 옷에서 햇빛과 바람의 향기를 도둑질했다.
지난 주말에는 도시 생활을 접고 지리산에 내려가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벽이 반듯하지도 않은 흙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친구는 건강했고 생동감 있어 보였다. 뒷마당에는 펄럭펄럭 빨래가 마르고 앞마당으로는 구릿빛 얼굴의 동네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들락거렸다.
처음 6개월은 모두가 경이였단다. 저기 저 하늘을 봐, 쏟아지는 별들을 봐, 물을 봐, 저기 저 나무, 저기 저 보름달, 저기 저 바람!, 밭에서 따먹는 오이의 맛, 흐르는 두통을 사라지게 하는 맑은 공기. 모든 것이 유혹적이어서 감미로운 유혹을 실컷 즐겼단다. 그런데 이제는 신혼 끝이라나. 이제는 모두가 일상이란다. 그렇지만 그 일상은 도시의 일상이 아니라고. 도시에서 일상이 되었다는 건 권태롭고 심심한 것이 되었다는 거지만 지리산에서의 일상은 편안한 것이란다. 도시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고. 넌 어떻게 도시에 사냐고.
아무 말도 안했는데 친구가 덧붙인다. 시골 생활의 가장 큰 단점은 사람이 없다는 거야. 너도 시골 와서 살려면 여기처럼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어야 돼. 그러면 후회 안한다.
우리가 어떻게 다 버리고 모두 시골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건 힘든 일이다. 우선 TV 보는 시간을 줄여보자. 무엇보다도 무심코 TV를 켜지 말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미리 체크하자. 물론 TV를 끈 그 시간에는 할 일이 있어야 한다.
‘TV 끄기 네트워크’가 제시한 대안활동들이 의미 있다. 도서관에 가라, 화초를 길러보라, 편지를 써라, 걷기·수영·자전거를 타라, 가족·친구와 요리를 해라,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라, 나무나 꽃 공부를 해라, 일기를 써라, 술래잡기나 원반던지기를 해라, 구름을 관찰하라, 지역행사에 참여하라, 집안 수리를 해라, 문화강좌를 수강하라.
그리고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권했다. 사랑과 요리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흠뻑 빠져라. 사랑하는 사람과 다툴 때 현재의 일만을 다루어라. 결코 과거를 끄집어내지 마라. 매년 당신이 가본 적이 없는 곳을 방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