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산도르 마라이의 <결혼의 변화>는 그 삼각관계를 다루면서 열정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그 부인은 한 남자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만 죽이고 말았어요. 칼이나 독약으로가 아니라 그 남자를 놓아주지 않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 부인 일롱카는 사랑하는 남편이 다른 곳을 쳐다보는 고통 속에서 한없이 외롭고 불안해져 이렇게 고백하는 여자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순화되며 더욱 현명해지고 이해심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오히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차갑고 냉정해지면서 무관심해진단다.”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다. 분명히 고통을 통해 보게 되는 진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롱카가 저렇게 고백하는 것은 이혼을 하고서도 떨쳐버리지 못한 미련 때문이다. 그녀의 미련인 페터는 하녀 유디트를 사랑한다. 유디트는 오랜 가난에 적응하느라 체념의 깊이까지 체현하게 된, 도도하고도 야만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너무나 많이 가져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도 못하는 기득권층의 경직된 삶을 경멸하면서도 동경하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뭔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방어하며 살아.… 그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뭘 보고 알 수 있었냐고? 뻣뻣하게 굳은 걸 보면 알 수 있었어. 뻣뻣한 몸놀림, 뻣뻣한 말투, 그들의 몸놀림에서 유연성이나 부드러움, 자연스러움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거든.”
유디트는 그런 집안에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완벽하게 구비해놓은 집을 두고 그 집안을 가득채운 잡동사니는 일종의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이 매혹적인 하녀는 점잖고 정중한 신사 페터에게 정열의 본질을 일깨우는 중요한 여자다.
“자연이 선의에서 사랑을 부여한 게 아니냐고? 자연은 그렇게 호의적이 아니네. 자연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인간에게 행복을 약속한 게 아니냐고? 자연에겐 이런 인간적인 환상이 필요 없네. 자연은 다만 창조하고 파괴할 뿐일세. 그게 자연의 임무이지. 자연은 계획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냉혹하고, 그 계획이 인간을 넘어서기 때문에 무심하네. 자연은 인간에게 정열을 선사하고도 그 정열이 절대적일 것을 요구하네.”
그래서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멸의 위험을 무릎 쓰는 것은 마라이에 따르면 오로지 완벽하게 ‘존재’하고 싶기 때문이다.
탈대로 다 타야 한다.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다. 단순히 쓸 곳이 없는 게 아니라 그게 시퍼런 칼날이 되어 ‘나’를 상처내고, 주변 사람들을 상처낸다. 탈대로 다 타야만 완벽하게 존재했다는 느낌을 갖는 것, 그것이 생명이고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