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대 이주향교수 | ||
건강검진에 병명이 나오지 않아도 아플 수는 있는 것이어서 나는 아파서 그를 찾았고, 3시간을 기다린 후에 그에게 침을 맞았다. 아프지 않았으면 3시간이나 기다렸을까? 기다리면서 짜증도 났다. 그냥 갈까도 생각했지만, 내 편두통이, 두통약을 먹지 않겠다는 내 의지가 겨우 붙들었다. 예약을 받으면 얼마나 합리적일까. 그런데 그의 침술원엔 예약이 없다. 새벽 6시부터 환자를 받는데 오는 순서가 침 맞는 순서고, 뜸뜨는 순서다. 재수 좋은 날은 두 시간, 아니면 서너 시간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다.
그렇게 환자가 많은데도 그는 전날의 나를 분명히 기억했다. 정확한 진료카드도 없는데 맥을 짚으며 두통은 어떠냐고, 아픈 증상에 관해 이것저것 문진했다. 그는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했다.
첫날의 그 길고 지루했던 기다림 때문에 다음 날부터는 책을 들고 갔다.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중에 집중하는 묘미가 있으니까. 그 때 읽은 책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그의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수업>이었다. 인생은 수업이고, 상실과 이별은 인생의 박사과정의 필수과목이므로 상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단다. 상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장 큰 상실은 사랑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더구나 수많은 이를 치료하고 위로했던 엘리자베스는 10년 동안을 반신불수로 살면서 그야말로 인생의 박사과정 수업을 훌륭히 소화해낸 인간 중의 인간이어서 미국 시사주간 <타임>에 의해 “20세기 100대 사상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차츰차츰 내 편두통도 사라져갔다. 나는 그게 신기해서 할아버지가 잡아준 뜸자리에 매일 두 번씩 뜸을 떴다. 온몸이 화상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문신처럼 아름다워 보였으니! 그런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두 번씩 할 필요 없어! 하루 한 번이면 돼. 건강에 대한 욕심도 부리지 마. 욕심 부린다고 건강해지나. 기다릴 줄 알아야지. 기다릴 줄 모르고 조급하면 그게 병인거야. 자꾸 올 것도 없어. 잡아준 뜸자리에 뜸을 뜨다가 서너 달에 한 번 정도 뜸자리가 바뀔 만하면 그걸 바로 잡기 위해 오면 되는 거야.”
그는 오랜 습관이 만든 병을 단박에 잡으려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 같은 내 태도를 따뜻하게 질책했다. 거기서 나는 다시 한번 배웠다. 기다림도 인생 박사과정의 중요한 과목이라는 사실을!
12일 오후 3시 30분에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침구의(鍼灸醫)였던 허임 선생을 조명하는 시간이 있다. 나는 이번에 알았다. <동의보감>의 허준은 약처방을 내리는 약의(藥醫)였지 침구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선조임금 때 약의 허준과 침구의 허임이 동시에 등장하여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했다고 하니 <침구경험방>으로 남아있는 허임의 행적은 우리 의학계의 중요한 보고(寶庫)가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