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러면, 이 덧없는 한 세상 지나가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이 문장이야말로 <황진이>의 주제이면서 전경린이 만들어낸 황진이의 인생이기도 하다. 전경린에게 황진이는 빼어난 재색으로 고관대작을 유혹했던 기생이 아니다. 황진이는 양반으로 자랐으나 양반도 아니고, 어머니를 꼭 빼어 닮았으나 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인이 정체성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갔는지 그 모범을 보여준 철학자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양반이라는 중심부에서 저 멀리 주변부로 밀려난 황진이를 다시 태어나게 한 존재는 모두 주변부 인생이다. 그들은 유학 중심의 조선에서 천대받았던 스님이고, 적자 중심의 조선에서 설움 많았던 서얼 이사종이며, 그 당시 학문의 비주류였던 서화담이다. 전경린의 <황진이>에서 서화담은 황진이의 유혹의 대상이 아니다. 중심부에 낄 수 없는 재야 철학자였던 서화담은 황진이 철학의 원천이고 황진이가 진심으로 공경했던 스승이다.
서화담이 묻는다. “너에게 몸이 무엇이었느냐”고. 황진이는 이렇게 말했다. “사내들이 제 몸을 지나 제 길로 갔듯이 저 역시 제 몸을 지나 나의 길로 끊임없이 왔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황진이가 말한다.
“어찌 후회한 적이 없겠습니까. 인생 전체가 모두 실수라고 생각한 적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 의지대로 선택했기에 세상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중심에 끼고 싶어 안달인 주변부 인생이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주변부 인생들과의 교감 속에서 덧없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과정이 매혹적인 것이 전경린의 <황진이>다. 전경린은 황진이가 남성에게는 ‘담대한 인격과 신비로운 운명과 미적 권력으로 가진 매혹적인 아니마’이고 여성에게는 ‘실종된 여성성의 긴 공백을 단번에 메울 수 있는 존재론적 자유혼의 표상’이라고 했다.
그 황진이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황진이 역을 맡은 배우 하지원이 정체성 위기라는 고통 속에서 고독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 속 깊고 부드러우며 그러면서도 도도한, 달빛 같은 매력으로 우리를 매혹하는 황진이를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녀는 너무 밝고 너무 당당하기만 하다. 실존적 고뇌 속에서 내면화된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드라마는 소설과는 다른 황진이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역시 책이 좋다. 신분이 전부인 세상에서는 결코 중심부에 낄 수 없는 주변부 인생들, 그렇지만 중심부를 버림으로써 매혹의 중심이 된 사람들의 매혹적인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들의 허기진 곳, 아픈 곳, 무서운 곳, 꿈꾸는 곳이 보인다. 그 곳에서 평화를 찾아가야만 공부를 이룬 것이라고 하던가. “늘 편안하십니다. 스스로 편안함이 없으면 공부가 부족한 것이라 하십니다.” 황진이처럼 스스로 깊은 고독을 선택한 자가 황진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고 황진이처럼 편안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