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대 교수 이주향 | ||
계절은 어지럽고, 세상은 시끄럽고,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부동산 때문에, 교육 때문에, 일자리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계절이 상처투성이고, 세상이 상처투성이고, 사람들이 상처투성이다. 상처는, 그것이 부활을 향한 노래가 될 수 없다면 절망이다.
최근에 어부왕 신화를 통해 남자의 본질을 다룬 책, 로버트 A.존슨의
그런데 이상하다. 왜 어부왕의 내적인 상처가 외적인 세계에 영향을 미칠까. 어부왕이 신음한다고 해서 세상이 함께 앓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건가. 존슨이 말한다. 내면에서 모든 것이 바르게 진행될 때 외부세계의 일도 잘 진행되는 거라고. 내면에 상처가 깊으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배가 있는 어부왕의 성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성에서는 매일 밤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지만 상처가 깊은 어부왕은 아름다움에 동참하지 못한다.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세계는 바로 상처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통해 세상을 보는 그에게 세상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강남에 집을 샀다고. 아이들이 명문대학에 입학했다고. 아니다, 결코 아니다. 위장된 축복 속에서 상처는 깊어질 뿐 치유되지 않는다. 무엇 무엇 때문에 불행하다는 우리의 노래는 상처의 결과일 뿐이었으니까. 당연히 어떤 ‘때문에’가 해결되면 책임을 전가할 다른 ‘때문에’가 생긴다. 이렇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하면 상처는 더욱 깊어진다. 초라하고 가난할 때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마르케스의 말은 빈 말이 아니다.
파스칼이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조용한 공간에서 고요하게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고. 분주하지만 불안하고 한눈팔지 않았는데도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시대에 오히려 간직해야 할 말이 아닐까. 고요해진다는 것은 탐욕으로 무뎌진 내 욕망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다른 집단의 문제를 짚어낼 때는 예리한 비평가가 되면서 정작 자기에 대해서는 맹목적이고 둔하다. 욕망이 앞을 가리고 어리석음으로 헛발을 내딛으니 마음의 불안과 분노와 상처는 변주될 뿐 치유받지 못하는 것이다. 봉은사 조실이신 종범스님이 이런 얘기를 한다. “지혜를 막는 건 탐욕입니다. 그러니 보는데 탐심 없이 보는 게 지혜고, 듣는데 욕심 없이 듣는 게 지혜고, 먹는데 탐욕스럽지 않게 먹는 게 지혜입니다.” 단순하지만 명쾌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