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복거일 | ||
그래도 북한이 무도한 정권에 의해 다스려지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거기서 어려운 물음이 나온다: “전체주의 사회에도 진정한 작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작가는 개인들을 다룬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개인들의 혼란스러운 경험들에 질서를 부여한다. 작가들의 이런 태도는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르낭(Joseph Ernest Renan)의 얘기에 잘 요약되었다: “사람은 그의 언어에도 그의 민족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만 속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로운 존재, 즉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모든 진정한 문학 작품들이 궁극적으로 도덕적 선언인 까닭이 있다. 자유롭기 때문에, 진정한 작가는 도덕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전체주의자들은 자유롭고 도덕적인 개인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적인 것은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문필가 바레스(Auguste Maurice Barres)의 주장은 이런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개인은 자신의 도덕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개인의 도덕은 전체주의 국가가 그에게 내리는 지시들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 사회엔 올바른 뜻에서의 작가는 존재할 수 없다.
실제 상황은 더욱 나쁘다. 전체주의의 경제적 질서는 ‘노동의 지도’를 포함한다. 즉 전체주의 사회에선 개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앙의 계획 기구에 의해 선택된 개인들이 작가가 되고 그들은 그저 체제에 봉사한다.
전체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권력을 지닌 소수의 전제적 정치가 되고, 이어 개인 숭배가 나오므로 작가는 궁극적으로 권력을 칭송하는 일만 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월북한 작가들의 운명은 이 점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동료들의 숙청을 도운 자들만이 살아남아서 ‘위대한 지도자’의 송가들을 썼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전체주의 사회에선 진정한 작가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작가들’은 선전선동 일꾼들이며 그들의 작업들은 진정한 작가들이 이루려고 애쓰는 것들에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대척적이다. 만일 진정한 작가가 존재한다면 소련의 솔제니친처럼 공식적으로는 작가로 인정 받지 못할 것이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보다 훨씬 엄격하게 통제된 현재의 북한 사회엔 숨은 작가조차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 작가들이 단체를 만든 것은 문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치적 행위다. 그것은 자유로운 작가들 사이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전체주의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율한 행사다.
그렇다면 북한의 현실이 바로 문제가 된다.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양쪽 작가들의 단체를 결성함으로써 남측 작가들은 북한의 현재 상황을 그대로 두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셈이다.
이 세상엔 삶이나 도덕적 선택에 가장 깊은 수준에서 관련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그런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나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은 사악한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찬성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사악한 정권이 원하는 것이다. 자신이 도덕적 선택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 작가는 작가가 되기를 멈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