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이광훈 | ||
원흉이라는 단어를 사전의 풀이 그대로 옮기면 ‘못된 짓을 한 사람의 우두머리’ 또는 ‘악당의 두목’이다. 그러나 부정선거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3·15 당시의 최인규 등 ‘원흉’들은 ‘못된 짓을 한 사람의 우두머리’라기 보다는 일선에서 선거부정을 기획하고 지휘한 정권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부정선거의 원흉들이 속속 검거되던 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12년 동안 머물렀던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의 승용차가 이화장으로 가는 동안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갈채로 민의에 밀려 하야한 권력자를 환송했다. 그리고 부정선거 원흉들이 단죄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권좌에서 물러 난 최고권력자는 유유히 망명길에 올랐다. 참으로 기이한 한국적 정치의 한 단면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제군주 체제에서 살아 온 탓인지 아무리 군주의 허물이 커도 권좌에 있는 동안은 군주를 직접 겨냥해 공격하는 일은 없다. 몇 차례의 반정(反正)에서 보듯 도저히 견디지 못할 상황에 이르면 “폐주가 황음무도하여 “운운하는 명분을 내세워 임금을 축출하곤 했지만 최고 권력자가 현직에 있는 동안만은 직접 겨냥하여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자칫 역린(逆鱗)을 건드려 자신은 물론 삼족까지 몰살당하는 참화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 민주공화국을 세운 이후에도 현직 대통령을 직접 겨냥해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인의 장막’을 치고 대통령의 귀와 눈을 막고 있다는 경무대 비서들이 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대통령의 경호 책임자였던 곽영주 경무관이 사형당한 것도 4·19 당시의 발포책임자였다는 죄목에다 ‘곤룡의 소매’ 뒤에 숨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했다는 세간의 의혹이 덧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경호실장이나 중앙정보부장 등 권력을 휘두르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비판의 대상이었다면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오랫동안 대통령과 신산을 함께 했던 실세들의 권력남용이 비판대상이 되곤 했다. 임기 중에는 주로 참모들과 측근들을 겨누던 화살이 임기말에 이르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는 것도 매 정권마다 겪었던 전철이다. 그 임기말에 날아오는 화살은 언론이나 야당 쪽이 아니라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 한다던 집권당 쪽에서 날아온다.
얼마전 청와대에 대한 국회운영위 국정감사에서 대통령 참모들이 곤욕을 치렀다. 대통령을 잘못 보좌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주로 여당의원들이 사수로 나섰다. 그 며칠 뒤에는 여당출신 국회 부의장이 ‘대통령 인사’에 ‘같잖다’고 토를 달고 나섰다. 그야말로 올 것이 온 것이다. 외곽을 때리다가 이제는 바로 핵심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대선후보 경쟁이 불 붙으면 그 때는 “계급장 떼고”가 아니라 “언제 계급장이 있었더냐”며 대통령에게 집중포화를 퍼붓는 사태가 올 것이다. 단임제 대통령 아래에서 임기말마다 한 번씩 펼쳐지는 정치 드라마가 이제부터 점입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