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대 교수 이주향 | ||
사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자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른다. 닮는다는 게 뭔지, 아무리 잘 먹고 잘 컸어도 본능적인 사랑에 허기진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혹은 자신의 장점만 닮아 잘 자란 자식을 둔 부모들도 모른다. 차마 자식을 버려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어렸을 적 이 땅을 떠나 해외 입양된 이들이 가족을 찾고 싶다는 사연은 애절한 수사가 없어도 짠하다. 두 살이던 75년 1월 19일에 부산에서 발견되어 네덜란드로 입양된 양태호 씨는 이런 편지로 가족을 찾고 있었다.
“저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족과 부모를 찾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제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닮았을까요. 제 성격이 비슷할지 아닐지 제가 입양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른 이유는 전 오랫동안 허전함을 느껴왔습니다. 이 허전함이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날 때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양부모가 괜찮은 이일수록 버려졌다는 박탈감과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 문제는 잠들지 않고 안에서 날뛰는 법이다. 나이는 힘이 있어 ‘나’를 버린 부모를 이해한다 해도 ‘나’의 뿌리를 모른다는 것이 어찌 갑갑하지 않으리. 더구나 사춘기를 거쳐 어른으로서 잘 성장하게 되면 ‘나’를 버리고 애가 탔을 부모에게 잘 살고 있다고 전해주고 싶지 않을까. 미국으로 입양된 82년생 차덕수 씨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당신을 찾아서 내 소식을 들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뉴저지 남쪽에 있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최근 저명한 신문사의 전산부에서 일하고 있으며, 애플 컴퓨터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제가 잘 있고, 제가 당신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제게 벌어진 일에 대해 화가 나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잠시 같이 있었던 그 순간을 당신이 알고 계시기를 원합니다. 보고싶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뿌리가 흔들릴 때 삶 전체가 부평초가 된다. 그때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리움이 생긴다. 그리움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보고 싶으면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