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이광훈 | ||
워싱턴, 제퍼슨, 링컨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우리에겐 조금 낯선 이름이다. 루스벨트는 재임 중 필리핀을 지배하는 대신 일본이 조선침략을 묵인하는 이른바 ‘가쓰라 태프트밀약’으로 우리와는 악연으로 얽힌 대통령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는 미국역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정력적이고 개혁적인 대통령으로 각인돼 있다.
마흔세 살 때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재임 중 미국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퇴임 후에 또 다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바람에 일부 사가들은 그를 역사상 최악의 전직 대통령으로 손꼽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육군장관 태프트를 후임 대통령으로 밀어 당선시키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러난 것까지는 좋았으나 태프트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자 루스벨트는 진보당이라는 제3당을 만들어 또 다시 대통령에 출마한다. 공화당이 두 쪽으로 갈라졌으니 승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민주당 후보인 우드로 윌슨이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공화당 후보 태프트와 진보당 후보 루스벨트는 두 사람 모두 참패하고 말았다. 198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와 매우 흡사한 상황이 80여 년 전 미국에서 이미 벌어진 것이다.
루스벨트가 재출마를 부추기는 일부 주지사들과 열혈참모들의 권고를 단호하게 뿌리쳤더라면 전직 대통령이 다시 출마하여 참패하는 망신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훌륭한 정치인은 자신의 심복이나 열혈참모들의 격정을 통제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모들의 과잉충성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 몰락을 자초한 정치인은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요즘 ‘흘러간 정치인’의 복귀문제가 세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두 차례 대선에서 낙선한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잇단 정치적 발언을 정계복귀의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이가 있다. 그런가하면 부산시장이나 국회의원에 출마, 정치를 계속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노무현 대통령은 평통 연설을 계기로 퇴임 후에도 정치활동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소문이 선거철마다 한번씩 떠돌다 사라지는 뜬소문이기를 바란다. 굳이 황진이의 명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일도창해(一到滄海)한 물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 흐르는 세월에 2006년 12월 31일이 두 번 오지 않듯이 한 번 바다로 흘러든 물이 육지로 다시 거슬러 오는 법은 없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말도 있지만 한 번 흘러간 물은 흘러간 물일 따름이다. 흘러간 물이 다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욕이다.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력에 흠집이 난 것은 엘바섬을 탈출, 황제자리에 복귀하면서부터였다. 나폴레옹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노자의 가르침을 몰랐던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