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대 교수 이주향 | ||
<대장금>의 이영애 씨. 어머나, <대장금> 끝난 지가 언젠데, 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벌써 끝난 <대장금>을 홍콩에서는 작년에 방영한 모양이다. 여기서도 그랬듯 거기서도 인기짱이었단다. <대장금>을 보았을 때 나는 성실하고 집요하고 억척스런 장금을, 투명하고 맑게 생긴 이영애 씨가 연기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대장금> 이후로 이영애 씨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어쩌면 거기 우리의 꿈이 들어있는 건 아닌지. <대장금>에는 신데렐라처럼 착하면서도 신데렐라처럼 무력하지는 않고, 성실하고 억척스럽지만 아름답고 청순하고, 고통받는 중에도 늘 동반자가 있어 평생이 달콤한 그런 삶의 꿈이 들어 있었다.
홍콩 사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지금 홍콩에서는 이영애 씨가 최고의 스타란다. 물론 <대장금> 때문이다. 친구는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제주도로 귀양 간 장금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 아름다운 제주도에 가서 사는 게 어째서 벌이니? 오히려 휴식일 거 같던데!”
“옛날에는 세상이 온통 아름다웠기 때문에 특별히 제주도만 아름다웠던 게 아니야. 그런데 교통이 불편했으니까, 한양에서 멀리멀리 떨어져 그나마 편리한 문명과 격리되고 정든 사람들과 오랫동안 격리되고, 했던 것이 무서운 벌이었던 거지.”
그는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가끔은 가족들과도 떨어져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도 있는 거잖아. 더구나 제주도는 너희 나라에서 가장 날씨도 좋고 풍광도 좋은 곳인데(그는 홍콩인이라 우리가 행복하게 느끼는 전형적인 가을날씨도 춥다고 했다), 그런 곳으로 보내는 게 왜 벌이야. 휴식이고 축복이지!” 나는 더 이상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손을 들었다.
“그래, 휴식이고 축복이다. 옛날에 우리의 벌에는 운치가 있었거든. 하나의 벌에 축복 하나씩을 끼워 넣었지.”
그러고 보니까 <대장금>을 봤을 때 안타까웠던 대목이 생각났다. 질투의 대상이 되어 늘 이리저리 공격당하고 엄격하기 그지없고 자기 가치가 평가절하되기 바쁜 수라간을 천하의 장금이 왜 그렇게 고집할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권력욕도 없으면서. 저렇게 억척스러운면서 무욕한 성격이면 궐 밖에서 훨씬 인간적으로 자기 자리를 만들 수 있을 텐데.
늘 빠지지 않는 그 조마조마한 대결구도가 재미있기는 했지만 “더 재미있게! 더 긴장감 있게!”라는 치열한 자본주의적 구호가 과거까지도 오염시키며 다른 여지를 남기는 것 같지 않아 나는 <대장금>을 그리 즐겨보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제주도에 가서 사는 게 어째서 벌이니? 오히려 휴식일 거 같던데!” 우리나라 사람이면 절대로 묻지 않았을 그 물음은 너무나 신선해서 내 속에서 자꾸자꾸 발효됐다. 그래, 귀양이 휴식일 수 있는 거였구나, 그래서 축복일 수도 있는 거였구나. 모든 벌에는 축복이 한 가지씩 들어있는 건데, 우리가 너무 경제적으로만 생각을 했구나!
당신은 지금 엎어졌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믿어보자.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가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