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 속의 판사는 독립해서 소신에 따라 진실을 밝히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치받기가 두려운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단의 결과가 나왔다. 상고법원의 설치를 둘러싸고 정치적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진행 중인 사건을 거래에 이용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상고법원을 만들려고 했을까. 상고사건이 많아 죽을 지경이라고 하면서도 대법관들은 그 숫자를 늘리는 것은 반대해 왔다. 왜 그럴까. 사법 관료체제의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대법관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권위는 유지하고 일은 상고법원을 만들어 아래 법관에게 떠맡기려는 발상은 아닌지 의문이다. 법이 바로 서려면 법관들의 출세 지향적 탐욕과 관료주의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 것들이 사법부 오염의 원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재판 때다. 권력의 뜻에 영합한 대법관들은 자리를 유지하고 사법부의 수장까지 된 사람이 있다.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예외없이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런 구조에서 하급법원도 오염됐었다. 정보기관에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고 사실을 조작해도 법관들이 외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필자는 젊은 시절 잠시 대통령 직속 기구에 소속된 적이 있었다. 대법원장이 될 두 후보를 놓고 평가하는 옐로 카드가 작성되는 과정을 어깨너머로 봤다. 공정하고 청렴한 분이 대법원장이 되지 못하고 정치성이 강한 인물이 선택됐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너 같으면 말 안 듣는 놈을 대법원장 시키겠냐?”라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시절 대법관 후보 두 사람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한 분은 지금 같은 독재 구조에서는 대법관직을 맡지 못하겠다고 자리를 사양했다. 존경할 만한 용감한 법관이었다. 다른 사람은 영부인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대법관이 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그런 삼류가 대법관이 되는 걸 봤다. 민주화가 되어도 자기사람만 심으려는 폐해는 여전한 것 같았다. 2년 전 대법관추천회의에 갔다 오던 대한변협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형식만 회의지 대법관 추천도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더라면서 분노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국민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이 법원이다. 덮기만 한다고 신뢰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깨끗한 사법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