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이광훈 | ||
이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노 대통령은 그동안 변호사와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 등 그야말로 ‘세치 혀’로 오늘의 지위까지 오른 분이다.
5공 청문회에서 보여준 논리 정연하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은 무명의 초선의원을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또한 그 세치 혀 때문에 임기 내내 설화(舌禍)에 시달려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은 말을 아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대통령이 세치 혀는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정국을 휘저었고 세치 혀 때문에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파동까지 겪어야 했다.
대선 예비주자로 여론지지도 1위를 달리던 고건 전 총리를 하루아침에 낙마시킨 것도 노 대통령의 세치 혀였다. “결과적으로 (고건 전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였다”는 노 대통령의 한마디가 고 전 총리의 등 뒤를 찌른 비수가 된 것이다. 결국 고건 전 총리는 이 말 한마디로 오랫동안 가꾸어 오던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범 여권의 영입순위 1위였던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의 발목을 잡은 것도 노 대통령의 ‘보따리 장수론’이었다. 손학규 전 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던 그 이튿날 노 대통령은 “경선에서 불리하다고 탈당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라며 “보따리장수같이 정치를 해서야 나라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일갈(一喝)한 것이다.
노 대통령이 이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손학규 전 지사의 탈당을 쌍수 들어 환영하던 범여권이 슬그머니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의 정세균 의장은 “손 전 지사와 당장 만날 계획이 없다”며 한발 뒤로 빠졌다. 또 열린우리당 탈당파인 통합신당 모임의 김한길 의원은 “손 전 지사가 우리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며 뜨악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통합신당 모임의 이강래 의원은 “새 집을 짓는데 기둥이 될 수 있다”는 말로 아예 신당의 대들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물론 손학규 전 지사로서야 범여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을 구상하고 탈당했겠지만 갑자기 안면을 바꾸는 염량세태(炎凉世態)에 심기가 불편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손학규 전 지사를 둘러싼 이 같은 상황변화는 노 대통령의 혀 밑에 숨은 비수가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잘 드는 칼일수록 너무 쉽게 뽑지 말라는 속담도 있듯이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데 현직 대통령이 이래라 저래라 직접 나서는 것은 성숙한 정치의 모습이 아니다. 게다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특정 예비주자에게 비수를 던지는 것도 나라의 장래를 위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차기 대선정국에 대한 대통령의 초연한 모습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