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개심사의 심검당은 단청도 하지 않아 그대로 자연을 옮겨놓은 것 같은 작고 소박한 요사채다. 구부러진 나무는 그 자체로 기둥이 되고, 기둥을 받치고 있는 돌은 모두 모양이 다르다. 냇가에서 주워와 그대로 쓴 것이다. 정 많은 할머니의 품 같은 저 집에서 살면 나도 문명의 때를 완전히 벗고 자연이 될 것 같다. 그러니 개심사에서 만나는 무상은 허무가 아니라 세속의 욕망이 별 거 아니라고 거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토닥거림이다. 입구의 소나무 숲부터 흐르는 물까지 개심사에는 세속의 욕망을 정화하는 빛이 있다.
그 개심사도 있고, 일락사도 있고, 사라져간 많은 폐사지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곳,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아들어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린 곳, ‘홍익인간’을 실현하고자 온몸을 던진 동학군들이 그 꿈을 삼키며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든 곳, 고통 때문에 눈 멀고 신음으로 미소를 잃은 이들을 위로하는 마애삼존불의 오묘한 미소가 있는 곳, 그곳이 여기 가야산이다.
그런데 온화한 기품으로 당당한 이 산 곳곳에 한전이 송전탑을 세운단다.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운 곳만 골라 추하게 파헤쳤는지. 일제 때 일본이 조선인의 기를 빼앗겠다고 풍수들을 동원해서 쇠말뚝을 박았음직한 그런 자리마다 송전탑을 세우고 있었다. 세상에, 자본에 갇히고 효율성에 갇힌 죄수들에게 생을 맡기고 자연을 맡기고 생명을 맡긴 꼴이다. 만일 전생이 있다면 저들은 백 년 전 이 땅에 쇠말뚝을 박았던 그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게다가 또 충남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 관광 편의를 위해 인간보다 오래되고 역사보다 오래된 저 가야산에 터널을 뚫겠단다. 21세기형 관광은 쭉 보고 빨리 달아나는 그런 관광이 아니다. 10분 아끼려고 터널을 이용해야겠다는 사람들이 무슨 여행객이겠는가. 수덕사도 보고 개심사도 보고 일락사도 보고 문수사도 보고 보원사지도 보고 가야산도 오르고 해미읍성도 걸어보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아도 길 좋고 풍광 좋은 가야산 일대를 두고 보기 흉하게 뚫린 터널을 이용하고자 할까? 내포문화권 개발 예산으로 나온 혈세를 쓰겠다는 욕심으로 만들어지는 볼썽사나운 개발 계획이 오히려 내포문화권을 망치는 계획이니 이 황당함을 어이할지.
멀리 서해바다가 아득히 보이던 봄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하산했다. 서쪽하늘을 물들인 노을은 가야산이어서 더 아름답고 가야산을 지키고 싶어 더 아름답다. 아, 감탄 속에서 나는 듣는다. 수천 년 침묵해온 가야산의 신음소리를. 나는 감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불안한 가야산의 운명이 아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