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 방식으로 폐기했다. 사진은 지휘소와 건설노동자 막사가 폭파되는 모습. 길주 AP/연합뉴스
필자가 북한 내부관계자를 통해 최근 입수할 수 있었던 문제의 지시문은 지난 2월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131지도국과 제2자연과학원의 책임일군들에게 하달한 것이다. 131지도국은 핵폐기장 및 영변핵연구시설 건설과 운영을 직접 담당하는 중앙당 직속 부서다. 제2자연과학원은 북한의 첨단 전략 및 전술 무기 연구 및 개발 핵심기관으로 핵관련 개발 기술의 주요 기관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이 특별히 핵개발과 관련한 핵심 기술 관료들을 대상으로 별도의 지시문을 하달한 것으로 보인다.
시기도 참 묘하다. 2월 8일은 바로 북한이 기존의 4·25 창군절을 두 달여 앞당겨 치른 날이다. 이날 북한은 창군절을 기념해 대대적인 군사 열병행사를 진행했고, 전 세계가 이 현장을 주목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김여정 부부장을 비롯한 대표단이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가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시기기도 했다. 대남 관계에 있어선 평화의 무드가, 군사적으로는 긴장이 공존했던 날이다.
지시문은 크게 세 가지 대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지시문 서두에서 김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의 평화노선은 확고합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은 한쪽으로는 우리를 회유하고 한쪽으로는 핵무기와 현대적 살인무기로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 공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대 수령들이 고수한 자위적 국방노선을 언제나 고수하여야 하며 적들이 총칼로 덤벼들면 대포로 마주선다는 입장을 항상 견지하여야 합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김 위원장은 미국과 한국이 요구하는 CVID에 대해 일정한 선을 긋고 있는 셈이다. 특히 ‘선대 수령’을 직접 언급하며 자위적 국방노선을 고수하겠다는 방침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둘째로 김 위원장은 이 지시문을 통해 직접 핵개발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그는 “적들의 ‘겉치레 식’ 평화 전략에 대비하여 평화공세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라며 핵무기에 대해 “수십 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와 땀을 바쳐 이룩한 성과들은 후대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줘야 할 혁명의 전취물이며 만년대계의 창조물”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핵을 곧 혁명의 전취물, 만년대계의 창조물로 강조하고 있다. 어떤 보상과도 이는 바꾸기 쉽지 않음을 자위하고 있는 셈이다. CVID를 바라는 미국과 한국의 기본 입장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견해를 불과 4개월 전 자국의 핵개발 관련 핵심 관료들에게 내부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협상이 쉽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부분이 바로 세 번째 대목이다. 김 위원장은 이미 이 시기 지시문을 통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직접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당장은 핵실험장 폭파를 ‘세계평화’를 위하여 오늘 피눈물을 삼키면서 할 수 있겠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보다 더 현대적이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시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태양민족의 명예를 걸고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기의 만남에 나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경우에 따라서는 당장의 핵실험장 폐기가 보다 현대적이고 기술적인 핵무기 전력화를 위한 일종의 전술적 후퇴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를 김 위원장이 직접 암시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김 위원장은 지시문 말미에 “우리 당과 조국의 융성번영과 강성대국건설의 전초선에서 피 끓는 청춘과 생명도 서슴없이 바친 131지도국 동무들에게 당중위원회와 국무위원회 이름으로 가장 숭고한 경의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 지시문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 크다. 물론 이 지시문은 핵개발에 직접 관여하는 기술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담화 및 지시사항이 북한 내부에선 초법적 원칙과 규정을 의미한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세기의 만남을 앞둔 미국 내부에서도 여전히 북한과 비핵화 문제를 두고 벌이는 협상에 대해 의문을 거두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양보는 모두 쇼”라며 “북한은 결코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완전한 비핵화’와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를 두고 벌이는 싸움은 쉽게 결론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폐기’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지,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무엇을 제시할지 좀 더 유심히 지켜볼 대목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