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오는 6얼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판문점 선언’은 4·27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문 제목이다. 남북 정상회담 최초로 ‘완전한 비핵화’ 목표 확인을 채택한 선언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에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과 우려가 6·13 지방선거와 관련된 모든 이슈를 집어 삼키고 있는 형국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미국과 북한이 서로의 적성국 정상과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로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최초의 정상회담이자, 무려 70년 만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6월 12일은 지방선거 하루 전날이다.
광역단체장과 교육감 등 거물급 후보들이 한반도 평화 공약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일부 후보들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장밋빛 공약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2018년 5월 30일 한 청원자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A 후보가 학생들을 ‘북한에 수행여행 보내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며 “초중고 자녀를 둔 엄마들이 공약의 내용을 접하고 눈을 의심했다. 평화를 바라고 있지만 아직 북한은 위험한 나라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A 후보는 초중고생들의 ‘북한 수학여행’ 공약을 내걸었다. A 후보 공약집에는 “평화로운 한반도의 미래, 함께 만들겠다. 적대성 해소와 공존을 위한 남북교류 프로그램 운영”이라고 쓰여 있다. 그는 5월 9일 기자회견에서도 “학생들이 경의선을 타고 금강산 등 북한 지역으로 초중고생 수학여행과 일일 체험학습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역 학부모들은 냉담한 반응을 드러냈다. 학부모들의 모임 M 커뮤니티의 한 회원은 “아이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후보는 북한 수학여행 공약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즐겁게 배울 수 있나’를 연구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다른 회원 역시 “정시 확대나 고입 관련 문제에 대한 고민은 떠넘겨놓고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학부모들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지만 다른 지역의 교육감 후보들도 ‘북한 수학여행’ 공약 경쟁에 골몰 중이다. B 후보는 3월경 북한 수학여행과 남북학생 교류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해 달라고 청와대와 통일부에 제안했다. B 교육감 후보 공약집엔 “남북 학생 교류사업 추진, 학생 수학여행단 방북 기회 제공(금강산, 개성 등)”이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B 후보 측 관계자는 “3~4달 전까지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설전으로 우리는 전쟁을 걱정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바뀌었다”며 “남북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시대가 열린 상황에서 남북학생들의 동질성 회복이 중요하다. 평화 시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수학여행 공약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북한 수학여행 공약은 문재인 대통령이 만든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어서 편승한 전략이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이용해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며 “새로운 한반도 이슈를 공약에 담으면 집토끼와 산토끼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공약의 실현 가능성은 선거 이후의 상황에 달렸다. 인기 영합의 성격이 담긴 포퓰리즘 공약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B 후보 측은 “당장 수학여행을 가자는 것이 아니다. 공약의 방점은 수학여행이 아니라, 평화통일을 위한 교육 강화에 찍혀 있다”며 “다만, 수학여행처럼 남북학생들 간의 교류를 강화하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북한 교사들이 내려와서 우리 교사들과 공동수업도 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다”고 반박했다.
한반도 평화 공약은 광역단체장 후보 사이에서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도지사직에 출마한 C 후보는 5월 22일 “강호축을 남북평화의 축으로 발전시키겠다”며 “강호축은 남북평화와 국토 균형발전을 이끄는 통일과 평화의 축이다. 강호축에 평화 고속화 철도를 이뤄 남북교류 등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겠다”고 공약했다. C 후보의 공약집엔 “충북선 철도 고속화로 동해선을 연결해 북한, 유라시아(TSR)까지 진출, 강호축 지역에 백두대간 국민쉼터 조성”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은 북한과 구체적인 사전 협의 없이 실천할 수 없다. 차재원 부산 가톨릭대 교수는 “공약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후보들이 한반도 이슈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공약을 할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공약을 지킬 수 있느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북미회담이 가닥도 잡히지 않았다. 유권자들이 냉정하게 공약의 황당함과 실천성을 가려서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C 후보 측은 “우리 지역은 워낙 낙후돼 있다. 남북 화해 분위기를 떠나서 후보는 몇 년 전부터 강호축 공약을 꾸준히 주장해왔다”며 “남북 평화 국면에서 균형 발전을 이루자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에 질세라 야당 후보들도 더욱 과감한 공약을 내놓고 있다. 강원 지역에 출마한 D 후보는 동해북부선 철도 조기 추진,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광역단체장에 출마한 E 후보도 “청주를 통과하는 제2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북한 개성과 평양으로 이어지는 교통망을 구축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일부 후보들의 공약이 소속 당과 당대표의 입장과 차이가 뚜렷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경우만 봐도 연일 “핵 문제 협상이 김정은의 ‘위장평화쇼’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남북교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는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신뢰할 수 없다. 이번 미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이뤄지는 것을 결단코 반대한다”고 우려했다.
‘한반도 평화’를 전제로 공약 경쟁을 펼치고 있는 일부 소속 후보들이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 가릴 것 없이 북퓰리즘 공약 잔치는 계속되고 있다. 이슈를 선점하지 못할 경우 선거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위기감과 현실 정치의 어두운 단면이 투영된 것으로 관측된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