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이광훈 | ||
하기야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입에 풀칠하고 대충자금(對充資金)으로 나라 예산을 꾸리던 시절에는 워싱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 의회의원의 한국 관련 발언은 곧 바로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의 톱기사가 되곤 했다. 미국 의회의 지도자나 외교분과위원회의 웬만한 상원의원 이름은 미국인들보다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던 시절이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조찬 기도회에 참석한다는 구실로 우리 국회의원들이 불원천리 태평양을 건너가기도 했다. 그까짓 아침 한 끼 먹자고 열 몇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가느냐며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워싱턴의 실력자들에게 눈도장 찍겠다는 정치인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였다. 미국 정계 실력자들과 찍은 사진을 의정보고서에 올리겠다는 욕심에 웬만한 비난 여론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991년인가, 미국을 공식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부시 대통령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자당의 대선예비주자 김영삼 대표를 소개했대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김 대표는 부시와 악수를 함으로써 차기대권을 ‘낙점’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의 입방아였다.
아니나 다를까, 야당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정상회담에서 정치인을 소개하는 행위는 외교상 의전관례를 무시한 처사로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차기 대권후보를 점지 받으려는 얄팍한 술수”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 같은 시중의 입방아나 야당의 비판에도 김영삼 대표는 그 이듬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 우리도 이제는 미국의 원조 없이도 먹고 살 만큼 살림이 푸근해진데다 지난 대선 때처럼 오히려 미국을 비판하거나 아예 ‘반미’를 내세우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이른바 ‘잠룡’나 ‘이무기’들도 이제는 미국에 눈도장을 찍는다고 해서 그것이 ‘따논 당상’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챈 듯하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못가 안달이던 대선 예비주자들이 요즘은 평양을 못가 안달이다. 특히 범 여권의 후보가 되겠다는 정치인들은 이미 상당수가 평양을 다녀왔다. 더러는 뭔가 그럴듯한 선물 보따리를 가져온 듯 마치 북한 당국과 무슨 대단한 합의라도 이끌어 낸 것처럼 성과를 과대 포장했다가 뒷말을 듣기도 했다.
정치인들의 이 같은 평양행 러시가 끝내 못마땅했던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드디어 한 말씀 했다. “김정일도 아닌 두 번째 사람을 만나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이 사람 저 사람 올라가는 것이 부끄럽다”며 “이런 어리석은 자들, 그저 이북 눈치나 보고, 불쌍한 것들”이라고 쏘아붙인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이니 ‘불쌍한 것들’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나라의 장래를 떠맡겠다는 정치인들이 너도 나도 평양에 가겠다고 발벗고 나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