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대 교수 이주향 | ||
전업주부인 다른 친구가 말했다. 평균수명 40세 때 만들어진 제도를 평균수명 80세인 지금까지 유지하려 드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남편 회사를 가보니까 한숨이 나오더라고 했다. 여직원들이 어찌 그리 예쁘고 젊은지. “내게는 아이들이 크고 있다”고 위로 아닌 위로로 서글픔을 달랬단다. 자기는 <내 남자의 여자>의 배종옥과지만 <내 남자의 여자>의 상황이 너무나 이해된다고 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지수(배종옥 분)는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착한 여자다. 일주일에 하루는 시부모의 수족노릇을 하고, 또 이틀을 자원봉사를 다니며 기꺼이 남을 위해 기쁘게 봉사한다. 불행한 친구에게 집 얻어주고 반찬 만들어 나르는 착한 여자, 걷잡을 수 없이 착해서 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반면 그 착한 여자의 남편과 이기적인 사랑에 빠진 화영(김희애 분)은 도도하고 거만한 여자다. 남편의 자살을 경험해야 했던 여자, 자신에 기대 사는 속물적인 친정식구들이 싫어 이제는 자신만 위해 살겠다고 악을 쓰는 여자다. 그래서 자기 욕망에 충실하여 별 죄의식도 없이 친구의 남편과 사랑에 빠지고, 소위 ‘불륜’의 사랑을 목숨처럼 지키려 하는 여자다.
이상하다. 나는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드라마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심리드라마처럼 보인다. 불행한 화영이 벌이는 사랑게임은 절친한 친구의 행복한 가족을 향한 심통 같다. 그리고 그 심통은 교양 있게 사는 행복한 삶의 고정관념을 깨는 망치 같다. 당연히 내게는 지수와 화영이 두 인격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같은 인격의 그림자인 것처럼 화영은 지수의 그림자고, 지수는 화영의 그림자 같다.
지수의 주변은 완벽하다. 좋은 직장을 가진 좋은 남편, 좋은 자식, 지수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처리해주는 능력 있는 언니, 게다가 환한 마음으로 기꺼이 하게 되는 자원봉사까지! 넘치게 착한 그녀를 모두들 좋아한다. 화영은 그런 그녀에게 ‘자기’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몽학선생인 것은 아닐까.
화영은 야무지고 냉정하다. 그녀의 화려한 옷차림은 남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만을 드러내고, 오만한 표정과 남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는 오히려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방어벽처럼 보인다. 세상에 대한 상처가 많은 그녀는 세상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그녀는 점점 더 오만과 고독 속으로 유폐된다. 지수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화영이 얼마나 황폐한지를 드러내주는 그림자는 아닐까.
칼 융이 말했다.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꽃은 지는 것까지 꽃이고, 사랑은 이별까지 사랑이듯이 온전한 사람은 제 그림자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사람이다. 나는 바란다. 지수는 화영을 거쳐, 화영은 지수를 거쳐, 불쾌해서 외면하고 인정할 수 없어 아예 잊고 있었던 자신의 그림자를 껴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