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상 법원행정처장 및 전국 법원장들이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전국 법원장 간담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검찰에 수사를 맡기는) 그런 부분까지 모두 고려하겠습니다.”
5월 28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이 한 마디가 발단이었다. 그보다 앞선 25일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이 보고서를 통해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려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김 대법원장이 다시 논의를 지핀 것이다. 조사단을 이끌었던 안철상 법원행정처장 역시 형사조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발언으로 김 대법원장을 도왔다. 사법부 안팎에서 이번 사태의 매듭을 김 대법원장이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 대법원장 발언 이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숙원과제인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박근혜 정권과 재판 거래를 했다는 문건이 공개되면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15년차 미만 판사들이 주축을 이루는 단독·배석 판사들은 전국 각지에서 회의를 열어 ‘양승태 사법 농단’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그러자 검찰 수사의뢰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렸다. 이미 관련 의혹에 대해 10여 건 이상의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요청이 오면 바로 수사에 착수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기류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견 판사들 중심으로 수사 의뢰는 재판 독립 침해라는 논리가 확산됐다. 차관급인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6월 5일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형사고발, 수사 의뢰, 수사 촉구 등을 할 경우 향후 관련 재판을 담당하게 될 법관에게 압박을 주거나 영향을 미침으로써 법관과 재판의 독립이 침해될 수 있음을 깊이 우려한다”고 의결했다. 35명의 전국 법원장들도 7일 “재판 거래 의혹은 합리적인 근거가 없고 사법부가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해선 안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내부 조치에 의한 수습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소장파로 분류되는 일선 판사들은 국민들 정서와 동떨어진 판단이라며 강하게 불만을 쏟아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소위 ‘성골’로 불리는 부장판사나 법원장들 대부분 사법농단 주역인 법원행정처 출신들이다. 그들은 문제의식이 없다. 뭐가 잘못인지 모른다는 얘기다. 정권과 대법원장이 원하는 판결을 내리는 게 그들에겐 승진을 위한 조건이었을 수도 있다”면서 “양승태와 공범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대책을 기대하겠느냐”라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실제로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재판 거래 문서엔 몇몇 고등법원 부장판사들 이름도 포함돼 있다. 지방법원에서 근무하는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전직 대통령들도 검찰 조사를 받고 재판을 거쳐 수감됐다. 사법부라고 성역이 될 순 없다. 보수 정권에서 주류로 군림해왔던 이들이 국민들과 많은 판사들의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법원이 잘못한 것을 이런 식으로 덮으려 한다면 이제 어떻게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느냐. 또 그 판결을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겠느냐. 지금 드러난 혐의만 해도 충분히 사법 처리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검찰 수사를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또 다른 판사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일부 정치 판사들이 문제다. 그들이 제왕적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법원행정처 요직을 독식하며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능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판사들은 계속 한직을 맴돌았고, 줄을 잘 댄 판사들은 좋은 자리로 배치됐다. 양승태 체제에서 그 현상은 극에 달했고, 지금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의 지방법원 판사는 “사안만 놓고 보면 검찰이 아니라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 일선 판사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경우 추후에 더 큰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면서 “우리들의 (수사 의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사상 초유의 집단행동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취재를 위해 접촉한 중견 판사들은 이러한 기류에 대해 입장 표명을 꺼려하면서도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어정쩡한 처신을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부장판사는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같은 사안에 대해 조사를 세 번 했다. 문제가 나올 때까지 해보겠다는 것으로, 명백한 표적 조사다. 그럼에도 특별조사단이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김 대법원장이 다시 검찰 수사 문제로 법원을 들쑤셨다. 이럴 거였으면 일 년 넘게 뭣하러 판사들을 줄줄이 조사했느냐. 진작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어야지. 적폐청산 명분으로 반대파들을 내치기 위한 의도 아니냐”라고 주장했다. 이어지는 또 다른 부장판사의 말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정권과 결탁했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과연 문재인 정부로부터 자유로운가. 일부 강경 소장파 뒤에 청와대 특정인이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법원 안팎에서 파다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밑에서 승진했다고 다 적폐냐. 김명수 대법원장이 소속됐던 특정 모임 판사들이 이번 정권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그들이 또 다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무고한 판사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소장파들이 그렇게 욕하는 양승태 체제와 지금이 뭐가 다른지 궁금하다. 판사들은 드러난 증거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확인된 것 이상의 의혹을 얘기하고 있다. 인민재판이나 마녀사냥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우리뿐 아니라 전국 법원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런데 소장파들과 진보성향 판사들은 검찰 수사 의뢰를 반대하면 무조건 적폐라고 치부해버리는 상황이다. 현 정권 들어 그들은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다. 따라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들 눈에 벗어나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걱정 때문이다. 외부 여론까지 등에 업고 있어 반박을 했다간 적폐로 몰리기 십상”이라고 하소연했다. 한 일선 판사는 소장파 내에서도 다른 움직임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번 사태를 키운 장본인이다. 취임 후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순수한 목적으로 조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사법부를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일부 소장파 판사들을 중심으로 김명수 퇴진을 위한 연판장 작성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