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복거일. | ||
1883년 런던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페이비언 학회(Fabian Society)’를 만들었다. 점진적 전략을 뜻하는 ‘페이비언’이 가리키는 것처럼 그 모임은 점진적 방식으로 영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초기에 이 모임을 이끈 사람들은 버나드 쇼와 시드니 웹이었다. 운영 자금은 부유한 시드니웹이 댔다.
첫 사회주의 ‘싱크 탱크(think tank)’였던 이 모임은 국가 기구를 장악해서 재산의 공동 소유와 같은 사회주의 목표들을 이루려 했다. 그리고 여러 방면들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했고 영국에 사회주의가 널리 퍼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40년대에 앤토니 피셔(1915-1988)는 이런 상황을 크게 걱정했고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하이에크와 상의했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페이비언 학회’를 본받아 자유주의 싱크 탱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조언했다. 그 뒤 양계업으로 큰돈을 번 피셔는 그 조언대로 1955년에 ‘경제 문제 연구소(IEA)’를 세웠다.
IEA의 활동은 처음엔 ‘황야의 외로운 목소리’였다. 케인즈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당시 영국에서 정부 규제의 철폐, 공기업의 민영화, 감세, 노동조합의 개혁, 시장에 바탕을 둔 정책과 같은 주장들은 이단적이었고 많은 비판과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영국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자 보수당의 급진적 정치가들은 차츰 IEA의 주장들에 끌리게 되었다. 마거릿 대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뒤에 ‘유럽의 병자’로 불린 영국을 되살린 ‘대처주의’는 그렇게 다듬어졌다. IEA의 영향은 보수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자유 시장의 중요성은 마침내 노동당 정치가들도 깨닫게 되어 1990년대엔 자유 시장을 바탕으로 삼은 ‘블레어주의’가 나왔다.
피셔는 IEA의 운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자금만을 책임졌다. 그는 뒤에 ‘아틀라스 경제 연구 재단’을 통해서 자유주의 싱크 탱크들이 다른 나라들에도 세워지는 것을 도왔다. 그의 도움을 받아 세워진 싱크 탱크들은 무려 150개에 이른다.
그리 크지 않은 싱크 탱크들인 ‘페이비언 학회’와 IEA의 사회적 영향은 그렇게 컸다. 자선의 효과를 따진다면 웹과 피셔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선에 돈을 쓴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엔 IEA와 같은 싱크 탱크가 없다. 비슷한 활동을 하는 기구들이 서넛 있지만 활동의 영역에서 제한되었고 단기적 정책들에 주로 매달린다. 우리 사회에선 사회주의 사조가 늘 높으므로 IEA처럼 멀리 내다보고 자유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싱크 탱크는 꼭 필요하다. 피셔와 같은 ‘개명된 양계업자’가 번 돈을 효과적으로 써서 불멸의 업적을 남길 기회가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