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대 교수 이주향 | ||
깊은 심연 속 세상인 줄 알았던 종교 속 세상도 별 수 없는 것 같다. 지금 시끄러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신정아 씨와 변양균 씨! 변 씨는 나랏돈을 사찰에 지원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신 씨는 나랏돈 받은 주지들로부터 사례비를 챙겼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 비굴하고 더럽고 희망 없는 세상을 어이할까.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언론은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란다.
그렇듯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세상을 쫓아가면 언제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고, 보기 싫은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그보다 더 보기 싫은 사람이 돼야 한다. 늘 날이 서 있어야 하고, 분노에 차 있어야 하고, 불안해야 하고, 억울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성철 스님이라면 지금 불교를 둘러싸고 증폭되는 이 구설에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자기를 바로 보고,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고 하시지 않으셨을까.
광복 직후는 얼마나 혼란스러운 세상이었나. 이념적으로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현실적으로는 가난과 무지가 인생들을 짓눌렀다. 그때 36세, 젊은 성철 스님은 좌익이 맞다, 우익이 맞다 시시비비를 기린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중생들을 위해 테레사 수녀처럼 봉사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겠다고 산 넘고 또 넘어 첩첩산중에 있는 문경 봉암사로 들어간 것이다.
청담 스님, 자운 스님과 함께한 봉암사 결사의 전설은 그렇게 단순하게 시작했다. 아침에는 죽을 먹고 사시(巳時) 공양이 끝난 뒤엔 공양을 하지 않았다. 스님들이 직접 밥을 하고 나무를 하고 밭을 맸다. 매일 나무를 석 짐씩 하고 밭 매는 게 힘들어 달아난 스님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정신으로 산 것이었다. 대중공양이 들어오더라도 어느 특정 스님 개인을 지정해서 들어오는 것은 양말 한 짝도 받지 않았다. 잘살든지 못살든지 똑같이 평등하게 살자는 것이었고, 그렇게 삶으로써 봉암사 결사는 지금까지 전설이 된 것이다.
복잡한 세상일수록 단순하게 사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인가. 그 힘은 생이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것을 알아버린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함께 도를 구하는 친구, 즉 도반이 있었다. 좋은 친구, 좋은 도반은 복 중의 복이다. 좋은 친구, 좋은 도반이야말로 무상한 세상, 업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견책하고 북돋아주는 힘이니까.
봉암사 결사의 정신을 되새기는 법회가 10월 19일 11시, 종정 법전스님을 모시고 봉암사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날은 일반인들에게도 봉암사의 문이 열리는 모양이다. 그 당시 봉암사 결사의 막내였던 종정 스님은 무슨 얘기를 할까. 복잡한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을 도를 얻은 도인들의 발자취를 만나 내 마음을 살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