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가을햇살을 충분히 담고 돌아온 날 대청소를 시작했다. 처음엔 철 지난 옷들을 넣고 입을 옷들을 꺼내어 거는 단순한 옷장정리였는데, 하다 보니 대청소가 되었다. 하나하나 늘어난 옷은 어느덧 옷장 하나를 더 요구했고, 한 권 한 권 늘어난 책은 책장 하나를 더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방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책이 방에서 살고 옷이 방에서 사는 듯했다. 사는 데 뭐 이렇게 많은 게 필요한가.
한 사람이 사는데 이렇게 많은 게 필요하다면 정말 사는 게 죄다. 주말이면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것이 습관이 되고, 여기저기서 보내준 책이 제법 있으니까 책이 많은 건 이해가 되는데, 옷이 많은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철 지난 옷을 정리하다 보니까 올해 들어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도 많다. 올해 들어가 아니라 3년째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도 있었다. 캐런 킹스턴이 <아무 것도 못버리는 사람>에서 했던 한 얘기가 떠올랐다. 쓰지 않은 물건은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잡동사니인 거라는 얘기. 그렇게 잡동사니가 쌓이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삶의 비만이다. 즉,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증거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버리지 못하는가. 직접적인 이유는 그것이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지만 실제로는 삶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생이 나를 책임지지 않을 거라는 자폐증적인 생각. 그래서 우리는 3년 동안 입지 않은 옷을 옷장 속에 넣어두고, 10년 동안 읽지 않은 책을 서가에 꽂아두는 것이다. 그러니 책장 하나 늘어날 때마다 그만큼 권위적으로 변하는 것이고, 옷장 하나 늘어날 때마다 그만큼 속물적이 되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책에 대한 집착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 책이 없던 시절 한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읽고 또 읽는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꿈과 진실을 만나 키우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보지도 않으면서 보내지도 않는 책에 대한 집착은 그와는 영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붙들고 있어 다른 이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나쁜 연인만큼 나쁜 것이 아닐까. 책이 교감이 아니라 집착이라면 그것도 분명 병이다.
안되겠다 싶었다. 이렇게 쓰지 않은 물건으로 좁아지는 방은 그 자체가 죄일 테니까. 책장이 더 필요하지 않도록 책을 정리해 내고, 옷장이 더 필요하지 않도록 옷을 정리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바꾸니까 왜 그렇게 버릴 옷이 많고 주변 사람이 더 어울리는 옷이 많은지. 왜 그렇게 나를 떠나도 되는 책이 많은지. 100여 권을 정리해서 도서실에 기증을 했다. 요즘은 작은 도서실이 참 많이 생겼다. 더 이상 보지 않을 책들을 나눠준다면 많은 이들과 작은 행복을 나누는 것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