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박헌영의 이같은 방송연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만 하면 전국 도처에서 좌익세력이 총궐기하리라는 계산이 빗나간데다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의 참전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사흘간이나 남진(南進)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를 기다리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남침계획은 처음부터 ‘남조선 인민들의 총궐기’를 전제로 짜여졌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미 남침에 의한 통일 계획을 밝혔고 이듬해 봄 박헌영과 함께 다시 모스크바를 찾았을 때는 스탈린에게 남한에서 봉기할 좌익세력의 숫자까지 제시했다. 구 소련 붕괴 이후에 공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삼팔선에서의 공격이 남한 내의 빨지산 활동을 격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어, 남한 정책에 반대하는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이 무력시위에 나설 것임을 스탈린에게 보장했다는 것이다.
3년여에 걸친 6·25공간에서 피로써 피를 씻는 근친증오(近親憎惡)의 복수극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원혼으로 사라졌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인민군이 들어왔다 나가고, 국군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무수한 양민들이 반동분자 또는 부역자(附逆者)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인민군이 쳐내려 오자 전국 곳곳에서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좌익인사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은 이들이 인민군에 내응하여 무장봉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방 곳곳의 형무소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 등 좌익사범들을 끌어내 학살하는데 군이 동원된 것은 이 소탕을 전시작전의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학살극에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이라고 선동한 박헌영의 방송연설이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6·25 공간에서 저질러진 보도연맹원 학살 의혹사건을 직권조사하고 있다. 좌·우익 간에 보복성 학살극 중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의혹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 학살이 대한민국의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데다 그 동안의 남북 대치상황에서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의혹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진상조사는 편향된 시각이나 이념적 잣대에서 벗어난 균형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한 시대의 얼룩진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이 시류에 휩쓸리거나 이념적 틀에 얽매이게 되면 자칫 조사의 객관성과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 이번 조사가 지난 60년 동안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충돌이 빚어낸 과거사의 앙금을 말끔히 털어내는 씻김굿이 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