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군사정부의 서슬이 퍼렇던 1961년 12월 21일 오후였다. 점심식사가 끝난 오후 1시쯤, “조용수, 부소장 면회”라는 교도관의 말을 듣고 감방문을 나섰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오후 4시 6분에 시작해서 4시 24분에 끝낸 것으로 되어있다.
진보당사건으로 1959년 7월 31일에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도 집행사실을 통보받지 못한 채 형장으로 향했다. 길옆에 핀 꽃을 보고 “그 꽃 참 예쁘구나”라고 할 정도로 담담한 표정으로 형장으로 향한 죽산이었지만 막상 교수대 앞에서는 당국의 비정(非情)에 섭섭함을 털어 놓았다. “사람을 죽이려면 수염도 깎이고 머리 빗질이며 몸 단장도 좀 시킬 것이지….”
죽산이 처형된 것은 재심청구가 기각된 지 하루 만이었다.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은 1975년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도 그랬다. 대법원 확정판결 하루만인 4월 9일, 그것도 새벽에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생떼 같은 여덟 명의 목숨을 형장으로 보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렇게 빨리 형이 집행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진보당 사건의 죽산 조봉암, 민족일보 사건의 조용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8명 등은 정치재판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2007년 9월 27일 진실위는 “조봉암 선생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또 2007년 1월 24일, 서울 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수십 년 동안 구천을 떠돌던 원혼에게 뒤늦게 재심이니 명예회복이니 하는 조치가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 분명한 것은 아무리 재심이니 명예회복이니 해도 이미 죽은 목숨은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닌가.
지난해 12월 30일로 대한민국은 10년간 사형집행이 없어 ‘사실상의 사형제 폐지국가’가 되었다. 10년간 사형집행이 없으면 사형제 폐지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국제 기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사형제를 규정한 법률은 버젓이 살아있다. 15대 16대 국회에서도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었다. 17대 국회에서도 175명 의원명의로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까지 시렁 위에서 잠자고 있어 임기 안에 통과될 가망이 없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998명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도 확정판결을 받고 하루하루 피를 말리며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인 사형수는 64명이나 된다. 이들은 누가 면회왔다고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형수들이 면회왔다며 끌려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사형은 없어졌는데 법만 살아있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