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그런데 갑자기 왜 그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 강변을 걷게 되었을까. 그것도 100일씩이나, 노숙까지 해가며! 아닌 밤중에 홍두께처럼 발표된 ‘한반도 대운하 건설’ 소식에 경악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암묵적으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긴 했으나 대운하 건설은 안 된다는 이필완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모여야 말도 안 되는 ‘운하건설’ 백지화도 실현될 거라고 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걷는다는 얘기였다.
순례자들이 대재앙이 될 운하를 막아달라고 기도하며 한강 하구 김포의 애기봉에서 길 떠나던 날 기도회에 모인 김지하 선생의 말이 쟁쟁하다. “대운하는 역천입니다. 하늘을 거스르고 아름다움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이상한 겁니다. 있으면 잊어버리지만 없으면 악몽의 연속입니다.”
김지하 선생은 대운하를 ‘창자 꺼내기’라고 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낱낱이 드러내고 들춰내는 것이 아름다움이 아니듯, 국토도 그렇게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면 그 땅에 기대 사는 생명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더구나 삼면이 바다라서 온통 물길인데 운하가 웬 말이냐고.
논리는 분명하고 당당했으나 순례자들에게는 투쟁하는 자의 경직성이 없다. 아마도 흙을 딛고 걷는 저 걸음걸음 때문인가 보다. 저 걸음걸음이 문득문득 일어날 수 있는 경직성을 풀어주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까 그들은 단지 ‘대운하 백지화’를 위해 걷는 게 아니었다. 걸으면서 하늘과 바람과 햇살을 보는 것이다. 걸으면서 강을 보고 강을 느끼는 것이다. 수단이 수단의 힘에 의해 그 자체 충만한 목적이 되게 만드는 것, 그것의 자연의 힘이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젠가는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 마음은 나와 자연 사이에, 혹은 현실과 꿈을 잇는 징검다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꼭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어야 하나. 우리에게도 길이 있는데. 잊혀진 길을 헤치며 다시 걷는 사람들이 있는데!
햇살이 축복처럼 강물에 쏟아지고 강물이 바람과 놀면서 찰랑거리던 날, 나는 그들과 함께 강변을 걸었다. 걷다 보니 보인다. 스스로 춤을 추는 자연이. 스스로 춤을 추는 자연이 존재하는 한 아직 희망은 있다. 아직은 우리 산하가 아름답지 않은가. 대운하를 건설할 것이 아니라 순례길을 복원했으면 좋겠다. 한강에서 출발해서 백두대간을 넘어 낙동강까지! 반대로 낙동강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한강까지!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으면 좋겠다. 삶에 지친 사람들이 자신의 땀과 눈물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길이었으면 좋겠다. 경제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정직한 땀과 눈물이 스스로를 정화하여 자기를 만나는 평안으로 회향하게 만드는 길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