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육친을 미워한 죄의 복잡함을 어찌 함부로 논할 수 있을까.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이 말했다. 하나님은 “내 가장 약한 부분을 체험하도록 죄 짓는 것을 허용”하는 거라고. 그럴 것이다. 바로 그 부분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일 테니까. 이 생각 저 생각이 교차해서 모처럼 <파우스트>를 펴들었다. 젊은 날에 그리도 읽기 싫었던 책이 단숨에 읽힌다. 그러고 보니까 <파우스트>는 성서의 욥기를 참 많이도 닮았다. 박경리 선생이 그리도 욥기를 좋아했던 이유도 짐작이 간다.
욥의 고난은 이유가 없다. 악마의 제안으로 시작한 그의 고난은 표면상으로는 악마의 질투고, 이면으로는 성숙을 위한 시련이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자네는 뭘 하는 자인가, 라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을 기억하는지. “항상 악을 탐내면서도 오히려 늘 선을 이룩하는 힘입니다.”
예상치 못한 고난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남자가 욥이라면 억울하고 기막힌 운명을 받아들이며 구원하는 영혼이 된 여인이 <파우스트>의 그레트헨이다. 파우스트와 몰래한 사랑으로 처녀로서 임신하고, 해산하고, 아이를 죽였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그레트헨의 사랑은 ‘평화를 매장하는 사랑’이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비천한 자리에서 생에 대한 그레트헨의 저 통찰력!
“다른 처녀들이 딱하게 실수를 할 때 지금까지 난 얼마나 기세 좋게 헐뜯었던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책망할 때 아무리 지껄여도 말이 모자랐지. 죄가 검게 보이면 더욱 검은 칠을 하면서 무척 잘난 체를 했는데. 그런데 지금 내가 죄에다 몸을 맡겼구나!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모든 것이 아, 정말 좋았어. 사랑스러웠어.”
섣부른 해석이 독이 되는 불행이 있다. 막을 수도 없고 견디기도 힘든 어떤 것! 차라리 운명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어떤 고난이나 불행을 어정쩡하게 해석해 주거나 평가해주는 사람은 생을 함께할 친구는 아니다. 그륀은 <사랑한다면 투쟁하라>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이의 운명을 해석하고 그에 관한 이론을 내세우려 하는 것은 내가 그를 멀리한다는 표시다. 고난에 빠진 사람과는 관계 맺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론을 만들고 그 뒤에 숨는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이런 이론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욥은 우리에게 모든 섣부른 해석에 대항할 용기를 준다. 나에게 왜 이런 병이, 이런 운명이 찾아왔는지 알 수 없다. 이유도 모르고 그저 견뎌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욥의 이유 없는 고난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일 수 있을까. 사랑한 죄밖에 없는 저 순진한 처녀 그레트헨을 지나가는 잔혹한 운명을 무슨 이론으로 정죄할 수 있을까. 시리고 외롭고 아픈 운명을 통과한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따뜻함이 있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따뜻함 같은 것! 그레트헨이 그 시련을 통과하는 동안 파우스트는 어지럽지만 활력 넘치는 생명의 숲을 배웠다.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의 구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