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이상하다. 왜 단테는 지옥부터 갔을까? 아름다운 영혼 베아트리체가 인도하는 천국을 단박에 들어가지 못하고. 왜 그는 다시 생각만 해도 무서움이 살아온다는 고난의 지옥길에 들어서야 했을까? 비탄에 잠긴 옛 망령들이 절망에 발버둥치다 악을 쓰는 곳을 통과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옥은 버릴 수 있는 곳도, 버려야 하는 곳도 아니다. 차라리 지옥은 어미닭이 달걀을 품듯 품어야 하는 곳이다. 욕심을 부려보지 않고 무욕해질 수 있을까? 비탄에 잠겨보지 않고 평화의 사다리를 볼 수 있을까? 아옹다옹 다퉈보지 않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을까? 상처의 아픔을 모르고 겸손해질 수 있을까?
왜 <신곡> ‘지옥편’을 읽는데, 성철스님의 발원문이 생각났을까? 나는 저 발원문이 ‘지옥편’을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욕번뇌 얽매이고 명리허영 눈 가리워, 무서울 사 저 지옥은 바다보다 깊어지고, 삿된 마음 따라가고 악한 길만 달음치니 한량없는 죄의 모임 태산같이 높았세라….”
‘지옥편’에서 인상적이었던 곳은 애욕이 번뇌가 된 영혼들이 사는 제2옥이다. 그곳엔 파리스와 헬레네,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살고 있고, 아, 아킬레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살고 있다. 그들 중에 단테가 만난 이는 사랑 때문에 마침내 쓰라린 지옥을 경험해야 했던 프란체스카와 파울로다. 형수 프란체스카를 사랑해서 “이성(理性)을 버리고 육욕의 죄를 범한” 시동생 파울로는, 프란체스카가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끔찍한 사랑을 회상하는 동안에도 하염없이 울고만 있다. 애욕이 커질수록 번뇌도 깊은데, 왜 우리는 악착같이 애욕에 매달리는 걸까? 애욕에 숨겨져 있는 달콤한 매혹 때문인가.
오로지 사랑만을 보고 사랑으로 가는 길만 내는 애욕이 지옥의 아랫목이라지만, 사랑을 모르고 지옥에 가지 않는 것보다 목숨 건 사랑의 대가로 지옥에 가는 것이 훨씬 깊은 인생 아니겠는가? 심장이 시키는 대로 집을 짓고, 그 사랑 빼앗기면 지옥 끝까지 찾아가는 그 결연함 없이 어찌 천국엔 들겠는가?
생이 복잡하고 미묘한 것은 지옥을 통과하지 않고는 천국문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테는 애욕번뇌 얽매이고 명리허영 눈 가리는 화염의 지옥을 지나 연옥으로 간다.
탐욕과 분노와 불안이라는 지옥의 열기를 가라앉히면 거기서 숨겨진 보물이 생겨난다. 비로소 겸손과 사랑과 진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연옥의 시간은 성찰의 기도 시간이다.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드는 내 마음의 분노를 짓누르지 않고 꺼내보는 시간이고, 세포 하나하나를 물들이고 있는 불안과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끊으려 해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욕심을 인정하고 살펴야 한다. 좋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