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옛날, 까마득한 옛날이다. 벌써 1000년도 더 되었으니. 1000년 전 함허 득통선사가 도를 이룬 그곳에서 한 스님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삼매에 든 듯 고요한 모습이 아름다워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그 무엇도 남지 않을 그곳에서 갑자기 살아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기도하러 온 것처럼 스님이 나오신 법당으로 들어갔다. 아마 스님이 기도를 올리는 것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건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처럼 108배를 올렸다. 명치 끝에 걸려 있었던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스님이 기도를 하고 나온 우리를 보시더니 시고 달콤한 오미자를 내주셨다. 이쁘지? 뭐가 예쁘다는 건지 잠시 헤맸는데, 알고 보니 오미자를 내주고 남은 빈 병을 이름이었다. 예, 예쁘네요.
“나는 빈 병이 참 좋아. 그래서 이렇게 빈 병을 모아, 시원하잖아.”
그러고 보니까 찻잔 옆으로 빈 병 서너 개가 옹기종기 사랑받는 느낌으로 모여 있었다. 빈 병을 모아 뭐 하세요? “많아지면 버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왜 웃었을까? 나는 아직도 나를 감동시키고 기분 좋게 웃게 했던 그 말뜻을 알지 못한다. 내가 왜 그 스님의 말과 태도에 감동되었는지. 함께 갔던 후배는 그 스님의 뜰 안에서 봉선화 꽃잎을 따고 있었다. 뭐 하려고? “손톱에 물들이려고! 언니는 무슨 색이 좋아?”
나는 봉선화 꽃빛이 그렇게 다양한 줄은 처음 알았다. 흰 빛, 붉은 빛, 보랏빛, 분홍빛…. 봉선화 꽃밭이 화사했다. 응, 나는 흰색! 그런데 흰색도 물이 들어? “그럼, 원래 색을 만드는 건 꽃이 아니라 잎이잖아.”
그날 밤 후배는 돌 위에 봉선화 꽃과 잎을 올려놓고 빻고 있었다. 귀찮지 않니? “언니, 아까 환적대에서 못 봤어? 꽃들이 하나같이 사랑받아 잘 크고 있잖아. 그래서 손톱에 물들이고 싶었던 거야.”
홀연한 스님과 그 스님의 뜰 안에서 편안하게 잘도 크는 꽃들! 그날 밤 후배와 나는 봉선화 빻은 것을 오른손 검지와 새끼손톱에 올려놓고 랩을 씌워 놓고 잤다. 안에서부터 평화가 차올랐다. 아침까지만 해도 생이 권태롭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평화를 회복한 마음이 반짝반짝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다. 후배는 백반 없음을 걱정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백반이 없이도 꽃물이 잘 들었다.
빈 병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꽃밭을 가꾸는 그 마음으로, 봉선화물을 들이는 그 마음으로 살고 싶다. 그것이 기도 아닌지.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 사는 이 세상은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