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새벽하늘의 검푸른 빛은 신선하다. 생동감이 있다. 검붉은 빛으로, 푸른빛으로, 노란 빛으로, 붉은 빛으로 흐르고 흐른다. 마침내 흰빛의 아침이 될 때까지. 찬란한 새벽, 새벽하늘 아래 눈을 뜨면 그 때 나는 눈이다. 그저 눈이 되어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형형색색의 색채의 변화를 바라본다. 나는 아직은 하늘이 열려있는 내 작은 오층 아파트가 좋다.
검푸른 새벽부터 오렌지 빛의 아침까지 내 거실은 거실이라기보다 다락방이다. 한없이 편안해지고 한없이 순해지던 어린 시절의 어둑한 다락방처럼 그 시간에 나는 편안하게 풀려있다. 쿱 힘멜부라우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정화하고 그래서 풍요로워지는 새벽시간의 내 거실을 생각했다.
힘멜부라우는 건축계의 몽상가란다. 느낌을 따라가고 무의식을 따라가는 건축가다. 건축이 무의식을 감추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 힘멜부라우는 디자인을 할 때 기능을 생각하지 않는단다. 어찌 건축설계를 하면서 기능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기능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기능에 구속되고 관례에 구속되고 규칙에 구속되면 건물이 답답해지고, 그 건물 속에 사는 사람이 답답해진다는 얘기다.
현대의 도시에서 그가 주목받고 환영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네모난 아파트, 네모난 차, 네모난 빌딩에 갇혀 살면 생각조차 모나지 않겠는가. 그 모난 생각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현대인에게 너는 기계가 아님을, 너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임을 일깨워줄 뭔가는 정말로 절실하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쿱을 불러 우리가 사는 네모난 아파트를 다시 디자인하게 할 수도 없고, 생활의 끈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도시를 떠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네모난 내 집을 활용하는 수밖에.
모두가 잠든 시간 창을 열고 하늘을 보자. 그 때 당신의 창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꿈꾸는 다락방이 될 것이다. 당신은 의외로 하늘에 볼 것이 많다는 것에 놀라고, 검은 색이 얼마나 다양한지에 놀랄 것이다. 가끔씩 먹은 맘 없이 친구를 불러 친구를 위해 밥상을 차려보자. 따뜻한 밥 한 공기에 김치찌개만으로도 충만한 행복이 만들어짐을 알 것이다. 어떤 형태의 외식이든 외식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유가 거기에 있다. 집안에 ‘나’의 책상을 들이겠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개미처럼 돈을 모아보자. 당신의 집은 살아있는 도서실로 변할 것이고, 당신은 자연스레 서점과 친하고 책과 친한 지적인 엄마 아빠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거실에서 TV를 치워보자. 집에 들어와서 일상적으로 켜져 있는 TV가 집안의 중심이면 힘멜부라우가 와서 설계된 집이라도 별 수 없다. TV가 없어 갑자기 심심해진 시간을 견딜 수 없다면 아예 집 주위를 산책해보자. 건강을 위해 걷지 말고 그저 빈둥빈둥 산책하면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무들은 어떻게 변해 있는지, 계절은 어떻게 변해 있는지. 당신의 관찰의 힘이 당신을 여유롭게 하고 당신의 무의식을 깨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