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탈레스는 이 세계는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 기억하는 것은 그가 던진 바로 이 질문 때문이었다.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탈레스의 답은 “물”이었다. 싱거운가, 심오한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답이 싱겁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탈레스에게서 “질문”만을 챙겼다. 탈레스의 위대한 점은 궁극적 실체에 대한 질문에 있고, 그 질문으로 탈레스는 신화적인 세계관을 넘어설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문이란 그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이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무엇을 묻고 어떻게 묻는가, 하는 것은 무서운 자기현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물”이라는 답을 뺀 탈레스의 질문은 건조할 뿐더러 구태의연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탈레스가 버리기 시작했다는 신화의 세계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탈레스에게 질문만 챙긴 이들에게 신화는 허구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신화가 어떻게 허구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신화는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인류의 기억창고이며 무의식의 숲이 아닌가. 그리고 나니까 철학자들이 의미부여를 하지 않은 탈레스의 “물”이 내 마음 속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물은 생명이다. 생명은 개체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생명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흐르고 흘러 관계를 바꾸고 자기를 바꾼다. 물은 생명이고 변화다.
물은 정화다. 기독교에서는 물로 세례를 준다. 불결한 얼룩 때문에 주눅 든 생의 죄를 씻어내 생의 본질을 드러내어 생을 빛나도록 해주는 것이다. 세례는 너의 본질은 죄가 아니라고, 너는 물과 함께 맑아졌다고 일러주는 것이다. 그러니 물처럼 맑게, 물처럼 거침없이 흐르라고, 너의 본질은 물이라고.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고요하고도 정갈했다. 누가 검푸른 새벽하늘 아래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하늘을 향해 비는 그 여인을 “기복신앙”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물은 흐름이다. 흐름을 타고 흐르고 흐른다. 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돌고 돌며, 절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낙하한다. 모래사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며들며,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목마른 이들의 생수가 된다. 물이 두려움이 없는 것은 무정하기 때문이다.
물은 무정하다. 무상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상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권력이 무상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무상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해 고통스러운 것이다. 물에서 무상을 배우고 무정을 배워야 한다.
물은 매이지 않는다. 생명들을 만져주고 스며들고 스쳐가지만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는 물이다, 근원이 물이다. 물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다. 물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