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한 자유한국당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과 의원들이 15일 국회 로텐더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혹시나 했는데 충격적인 결과다.”
국회의원 재보선 당락이 결정된 6월 14일 새벽 야권 한 관계자는 “정계개편 회오리가 불가피할 것”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승리의 월계관’은 결국 민주당 몫이었다. 사실상 싹쓸이 패를 당한 한국당은 출구조사가 끝난 지 두 시간도 채 안 돼 전·현직 국회의원과 당협위원장으로 구성된 재건비상행동 회원들이 ‘홍준표 아웃’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 여의도 당사를 점거했다. 당 내홍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흉흉한 분위기였다.
수도권 3곳, 충청권 3곳, 영남권 4곳, 호남권 2곳에서 일합을 겨룬 이번 재보선은 사실상의 ‘미니 총선’이었다. 2020년 21대 총선의 축소판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의 현주소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민주당은 21대 총선과 지난해 장미 대선에 이어 이번 선거까지 압승하면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주류 교체론’의 깃발을 확실히 꽂았다.
민주당은 서울 노원병(김성환)과 송파을(최재성)을 비롯해 부산 해운대을(윤준호), 인천 남동갑(맹성규), 광주 서갑(송갑석), 울산 북구(이상현), 천안갑(이규희), 천안병(윤일규), 전남 영암·무안·신안(서삼석), 경남 김해을(김정호), 충북 제천·단양(이후삼) 등에서 모두 승리했다. 울산 북구와 충북 제천·단양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 득표율은 50%를 웃돌았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이번 선거에서 한국당 등은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정당의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했다”며 “한마디로 보수의 대몰락”이라고 혹평했다. 이로써 여의도 정국은 민주당과 그 주변 정당으로 나뉘는 ‘1.5당 체제’로 급속히 전환될 전망이다. 앞서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김민석 원장은 1.5당 체제에 대해 “다당제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하나의 중심정당과 복수의 주변 정당이 존재하는 체제”라고 정의했다.
반면 한국당은 경북 김천(송언석)에서만 이겼다. 보수의 마지막 보루인 대구·경북(TK)을 수성하면서 전패는 면했지만, 상처만 났다. 특히 낙동강 전선을 민주당에 내준 것은 뼈아팠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한국당이 TK당으로 전락했다는 증거”라고 일갈했다. 바른미래당은 당의 존립 자체가 흔들렸다. 한국당과 야권 대표를 놓고 겨뤘던 바른미래당은 당 간판급인 안철수 전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전 지역에서 완패했다. 당선권은커녕 두 자릿수 득표율 확보에도 허덕였다.
당장 보수 양당은 거센 내홍에 휩싸였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6월 14일 “모두 제 잘못”이라며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내홍 수습은커녕 갈등은 확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당은 조기 전당대회 등을 놓고 친홍(친홍준표)파와 반홍(반홍준표)파가 정면충돌할 것으로 보인다. 친박(친박근혜)계 정우택 의원 등 반홍파는 선거 전부터 “보수가 궤멸했다”며 ‘홍준표 책임론’을 거론했다. 홍 전 대표가 백의종군할지도 미지수다. 당 안팎에선 홍 전 대표가 비대위에 대표 권한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이른바 ‘작전상 후퇴’를 한 뒤 친홍파를 업고 조기 전대에서 부활을 노릴 것으로 본다.
홍 전 대표는 그간 사석에서 21대 총선 공천권을 종종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권 관계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홍 대표가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6·13 지방선거 전부터 몸풀기에 들어간 김무성(6선) 의원을 비롯해 심재철(5선), 나경원·정우택·정진석·주호영(이상 4선) 의원, 김용태 의원·이완구(3선) 전 의원, 낙선한 남경필(5선) 전 경기도지사와 김태호(재선) 전 의원 등과 친홍파 간의 당권 투쟁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 지점의 관전 포인트는 ‘무대’(무성대장의 줄임말)다. 김 의원이 ‘전면에 나서느냐, 막후 정치를 하느냐’에 따라서 한국당 당권 투쟁의 향배가 결정될 전망이다. 지방선거 전부터 김무성계가 특정 의원을 밀고 21대 총선 때까지 막후 조력자 역할을 할 것이란 얘기가 떠돌았다.
바른미래당은 와해 위기에 처했다. 재보선은 물론, 지방선거 광역자체단체장 선거에서도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핵심 관계자는 “참담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유승민 전 공동대표가 참패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당 내부에선 ‘안철수 책임론’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지방선거 내내 ‘한 지붕 두 가족’을 연출했던 바른미래당은 정계개편 과정에서 다시 쪼개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두 계파는 공천은 물론, 한국당과 연대·통합을 놓고도 함께하기 힘든 수준의 견해차를 드러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도가 높은 상황에서 치러졌지만, 선거 결과만 보면 국민이 야당을 심판한 것”이라며 “보수 전체가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문제는 야권 발 정계개편의 동력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간 TV 방송 등을 통해 “질 때 잘 져야만 다음에 기회가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정반대였다. 공천 과정에서 혁신도 보여주지 못했다. 선거 과정에서는 반문재인 프레임에만 의존했다. 한국당은 다수 국민이 지지하는 남북·북미 정상회담에서조차 어깃장을 놓으면서 ‘수구 냉전’ 이미지만 덧칠했다. 바른미래당은 이도 저도 아닌 포지션으로 야권 대표 선수는커녕 제3세력의 존재감도 살리지 못했다. 전계완 평론가는 “정계개편도 동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너무 크게 무너지면서 정계개편 동력의 싹을 잘랐다”고 말했다. 당분간 내분이 또 다른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지는 ‘리더십 진공 상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기간은 21대 총선 정국이 도래하기 전까지다. 그전까지는 ‘야권 내분→당권 투쟁→소규모 이합집산’ 등이 반복하면서 원심력에 군불을 지필 것으로 보인다. 관전 포인트는 이 과정에서 제기될 ‘야권 통합론’이다. 한국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김문수 전 의원은 단일화 전제조건으로 ‘당대당’ 통합을 제안했다. 한국당(113석)과 바른미래당(30석)이 통합하면, 의석수는 143석으로 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으로 올라선다. ‘정치 9단’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선거가 끝나면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통합할 것”이라며 “바른미래당 소속 호남 의원 6명은 돌아오라”고 압박했다. 바른미래당 호남 의원 6명은 박주선·김동철·권은희·주승용·김관영·최도자 의원이다.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야권 발 정계개편 시기는 ‘21대 총선 직전’, 규모는 단순한 헤쳐 모여가 아닌 ‘외부세력을 포함한 주도세력 교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야권 발 정계개편은 2020년 총선 직전에야 가능한 얘기”라고 밝혔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야권 발 정계개편은 지금까지 거론된 수준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여권 한 의원은 “현 야권을 보면, 구심점 없이 이전투구만 하다가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