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상 고려대 교수·전 총장 | ||
정부는 경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 외환보유액 방출, 은행의 외화차입 지급보증, 미국과 통화교환계약 체결, 중소기업 대출한도 확대, 기준금리인하, 재정지출 확대, 세금감면 등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총 지원금액이 130조 원에 이른다. 그러나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경제는 거꾸로 간다. 금융시장은 흔들리고 기업과 가계부도가 는다. 소비와 투자가 곤두박질치고 산업현장에서 폐장 분위기가 확산된다.
주요 원인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부실채권에 발목이 잡혀 함께 주저앉는 악순환 구조이다. 최근 금융기관들은 부실채권의 급격한 증가로 블랙홀이 되어 어떤 정책을 펴도 자금을 삼키고 만다. 그리하여 기업들이 자금 줄이 끊겨 줄줄이 쓰러진다. 흑자기업들까지 부도대열에 합류하여 부실기업들이 대대적으로 늘고 있다.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서로를 집단적으로 무너뜨리는 악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현 상황에서 시급한 것이 선제적 구조조정이다. 부실이 심한 금융기관과 기업들을 솎아내어 불안요인을 한시바삐 제거해야 한다. 그 다음에 자금을 풀어야 기업투자와 소비가 살아나 경제가 회생한다. 과거의 외환위기는 외화가 부족하여 나타난 일시적 부도위기였다. 따라서 구제금융을 받고 수출을 늘려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세계경제 불황이 산업기반을 와해시키는 구조적인 위기이다. 따라서 구조조정으로 자생의 몸부림을 치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부가 부실채권에 대해 임기응변식 대응을 하는 것이다. 최근 정부는 발등의 불로 떨어진 저축은행의 프로젝트 파이낸싱 부실대출을 매입하기 위해 1조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130조 원 규모의 금융지원도 모자라 국민 돈을 직접 넣는 것이다. 그러나 부실에 대한 책임규명이나 구조조정의 조건은 없다. 향후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경기침체가 심화되면 금융기관과 기업의 동반부실이 얼마나 늘지 모른다. 부실문제가 터질 때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계속하면 모든 고통은 국민이 떠 안는다.
그동안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돈벌이에 급급하여 산업발전 대신 부동산 투기를 부추겼다. 또 과도한 펀드발행과 부실한 생산투자로 금융시장과 실물경기를 망쳤다. 그러면서 경영진들은 몇 억에서 몇 십억 원에 이르는 연봉을 받았다. 이제 상황이 어려워지자 구조조정을 빌미로 근로자 들을 감원하여 약자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감원이 능사가 아니다. 올바른 구조조정은 경영자부터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을 일으켜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득을 증가시키는 구조로 경영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정부는 무조건의 자금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구조조정의 원칙과 기준을 명확히 정하고 회생이 어려운 금융기관과 기업을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수준에서 경제회생을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데 정부가 밑돈을 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