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최근에 자연사 박물관을 관람했는데, 거기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빌 게이츠가 자기 방을 고가의 그림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화석으로 꾸몄단다. 왜 빌 게이츠는 자기 방을 화석으로 꾸몄을까? 혹시 그의 방의 화석은 장식품인 것이 아니라 그의 거울인 것이 아닐까?
화석은 돌이다. 그냥 돌이라기보다 생명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는 돌이다. 그것도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불과 흙과 세월이 자연스럽게 기록한 것이다. 기록해서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난 것이 아니라 100만 년이 지나고 1000만 년이 지난 것이다.
우리 문명사는 길어야 6000년인데, 오랜 침묵 후에 묵언하는 성자처럼 자신을 드러낸 화석은 우리가 무겁고 버겁다고 느끼는 문명사를 한줌의 티끌로 만들어 한숨의 미풍으로 날려버린다. 자연사 속에서는 인간사도 어쩔 수 없이 자연사의 한 부분, 아주 작은 한 부분이다.
긴긴 자연사에 비춰보면 찰나를 사는 존재가 인간이고 ‘나’라고 생각하면 내가 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오히려 문명사적인 애증을 뛰어넘을 수 있다. 벌어도 벌어도 언제나 배가 고픈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내일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증을 내려놓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문명을 열기 훨씬 오래 전부터 자연이 준비해온 자연이다. 왜 우리는 모르는 척하는 걸까? 한 존재가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열정적으로 열정을 쏟아 왔는지를. 우리는 수십억 년의 세월이 만든 세월의 보물이다. 우리 몸에는 수십억 년의 족보가 새겨져 있고, 태어날 아이들이 들어 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는 것은 긴긴 세월 우리를 준비해온 자연을 모독하는 것이다.
알려졌듯 빌 게이츠는 무한경쟁의 시스템 속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 결과 돈을 참 많이도 벌었다. 그런데 그도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한단다. 세상에, 아까워라! 그런데 그 대목이, 각박하고 피곤한 ‘무한경쟁’의 세상을 주도한 그가 ‘무한경쟁’에 먹히지 않고 어린이처럼 ‘무한경쟁’을 가지고 논 것이라 해석하게 만드는 대목이고, 세속적인 것을 경멸해온 사람들까지 당황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한도액을 100만 달러로 정했다. 우리에게 100만 달러는 많은 돈이지만 그에게 100만 달러는 큰 돈이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천문학적인 재산에 비춰 보면 만분의 일이나 될까? 저 사람, 장사꾼이 아니라 예술가네, 하는 얘기가 절로 나왔다. 어쩌면 그것이 화석을 품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거 아닐까? 화석을 품는 마음이 공수래공수거의 이치를 안정감 있게 받아들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