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4일 6.13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내놓았다. 홍 대표가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여의도 당사를 떠나고 있다. 이종현 기자
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선 12곳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보수세가 강한 충남 천안갑까지 민주당은 후보를 낸 11곳 모두에서 승리했다. 한국당은 경북 김천에서 송언석 후보가 무소속 최대원 후보에 0.6% 포인트 차로 신승을 거둬 겨우 0패를 면했다.
민주당은 11석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130석으로 몸집을 불렸다. 여기에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민주평화당(14석)과 정의당(6석), 평화당과 뜻을 같이하는 바른미래당 소속 비례대표(3석)까지 협력할 경우 국회 내 과반의석을 넘기게 된다.
같은 보수야당인 바른미래당(바른미래)의 성적표는 더 처참했다. 광역단체장뿐만 아니라 226개 기초단체장, 국회의원 재보선 12곳에서 당선자를 단 한 명도 내지 못했다. 바른미래 간판으로 출마해 당선된 사람은 광역의원 824명 중 5명(비례 4명 포함), 기초의원 2927명 중 21명(비례 2명 포함)뿐이다.
이런 지방선거 결과는 오는 2020년 4월 치러질 총선에 대한 공포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당과 바른미래 의원 대다수가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는 선거 막판까지 후보 단일화나 연대에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 든 이후에는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유승민 전 바른미래 대표는 6월 14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한국당과의 통합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통합 불가를 외치던 기존 입장에서는 한발 물러선 것이다.
김태흠 한국당 전 최고위원도 사퇴 기자회견에서 “한국당이라는 낡고 무너진 집을 과감히 부수고 새롭게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할 때”라며 보수대통합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 야권 후보자는 지방선거 당시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실험용 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자구도로 선거를 치러도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실험해보는 것 같다”면서 “지방선거 결과 나오면 국회의원들이 그제서야 뜨끔할 거다. 자기들 선거(차기 총선)에서는 온갖 이합집산 다 할 거라고 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예측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평론가인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차기 총선 전에는 분명히 정당 간 이합집산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했다고 해서 곧바로 정계개편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 총선까지는 2년 가까이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태경 바른미래 최고위원도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선거 끝나자마자 정계개편을 이야기하기는 이르다”면서 “당분간은 내부혁신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했다. 6월 14일 바른미래 최고위원 간담회에 참석했던 하 의원은 “회의에서도 한국당과 통합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신용현 바른미래 대변인도 “아쉬운 선거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진 당 내부에서 정계개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면서 “추후 의원 모임을 할 텐데 그때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바른미래 한 관계자는 “당분간은 내부 혁신에 몰두하는 게 맞다. 우리 당의 원칙적인 방향은 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는 것이지만, 만약 한국당과 통합을 하게 되더라도 우리 당 지지율이 올라야 더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지금 통합 논의를 하게 되면 한국당에 흡수되는 수준밖에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충격적인 성적표에도 바른미래 자강파는 한국당과의 통합 반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안철수 전 대표의 측근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SNS를 통해 “중도와 제3의 길을 포기할 순 없다. 한국형 중도와 제3의 정당이 언젠가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거라 확신한다”면서 “긴 호흡으로 멀리보고 가겠다”고 적었다. 향후 바른미래 내부에서 자강파와 통합파 간 갈등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바른미래는 보수 대통합을 한다면 한국당과의 당 대 당 통합보다는 제3지대 통합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3지대에서 개혁보수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다는 시나리오다. 한국당에서도 보수 대통합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탈당 후 합류하라는 것이다. 한국당과의 당 대 당 통합을 시도할 경우 호남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당 출신 의원들의 대규모 탈당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미 민주평화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호남에서 당 존립기반을 마련했다는 자체 평가를 내놓으면서 국민의당 출신 바른미래 의원들을 향해 연일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안철수 전 대표는 국민의당을 깰 때 이미 한국당과 통합 로드맵이 있었다”면서 “속지 말고 돌아오라”고 했다.
한국당은 제3지대 통합론에 대해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있다. 한 한국당 당직자는 “지난 번에 바른정당으로 갔던 당직자들이 의원들 따라 복당하려다 온갖 수모를 당하지 않았나. 그때 이후 당이 어려워도 큰 집에 남는 게 최고라는 인식이 쫙 퍼졌다. 우리 당도 선거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바른미래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제3지대 통합에 합류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상수 한국당 의원도 제3지대 통합 가능성은 일축했다. 안 의원은 개인적인 생각이라면서도 “미우나 고우나 한국당이 2등 정당 아닌가. 한국당을 중심으로 보수가 통합되어야 한다”면서 “현재 야권에는 과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같이 제3지대 정당 만들 정도의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없다”고 말했다.
바른미래와 통합을 한다면 최소한 당명이라도 변경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 또한 어렵다고 본다. 정강정책 일부를 바꾼다든지 그쪽에 당직을 몇 개 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당명까지 바꾸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안 의원도 당장 정계개편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안 의원은 “내일 모레 선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라면서 “물론 총선 앞두고는 상황이 바뀔 거다. 총선 4~5개월 전부터는 위기감을 느끼고 서로 많이 양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한국당 전직 의원은 총선 전에 바른미래는 자연소멸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직 의원은 “지방선거에서 우리 당과 바른미래가 피 터지게 2등 싸움한 이유가 향후 정계개편 때문이지 않나.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될 만한 사람 밀어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2등은 한국당이라는 것이 확인됐으니 다음 선거에서는 보수 유권자의 한국당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라면서 “바른미래에서 곧 추가 탈당자가 나올 거다. 우리는 문만 열어놓으면 된다. 바른미래는 자연소멸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수 야권 개편의 주요 변수는 한국당과 바른미래의 차기 전당대회다. 차기 전당대회를 통해 어떤 인물이 양당의 대표로 선출되느냐에 따라 정계 개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각에선 홍준표 전 대표가 차기 전당대회를 통해 복귀하거나 친박계 인물 등이 한국당 당권을 거머쥘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개혁의 적임자로 볼 수 없는 인물이 당권을 차지하게 된다면 제3지대 통합론이 힘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당에서는 내부에 마땅한 인물이 없어 새로운 인물을 외부에서 영입해 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방선거 때도 새로운 인물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는데 뾰족한 대안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절망적인 전망도 나온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