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 ||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특파원 생활을 하고 있는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몇 해 전에 출간한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요리 이야기-맛을 통한 한민족탐험> 일본어판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나홀로 식사’가 괴짜로 비치는 원인을 ‘우리’라는 아는 사람끼리의 집단의식, 연대의식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늘 ‘우리’, ‘우리’라고 말하며 서로의 연계를 확인함으로써 안심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김승희 시인도 “안톤 슈낙의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에세이 속에 ‘오후 세 시에 점심을 먹는 사람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던가?”라며 밥 때를 놓친 늦은 점심의 슬픔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점심을 오후 세 시에 먹는 사람들이란 아마도 주방장이나 설거지에 바빴던 주방 아줌마, 테이블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 다녔던 사람들”이라며 일에 바빠 제 시간에 못 먹었으니 ‘슬픈 점심’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비록 식사 시간은 늦었어도 여럿이서 한자리에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먹는 식사는 ‘슬픈 점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점심시간을 통해 한솥밥을 먹는 ‘우리’끼리의 끈끈한 연대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데다 바쁘게 일한 뒤에 찾아오는 느긋한 성취감까지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작 ‘슬픈 점심’은 어느 ‘우리’에도 끼이지 못하고 오후 세 시에 혼자서 먹는 점심이다. 오후 세 시는 이미 종업원들이 식탁을 행주질하거나 의자를 정돈하며 저녁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 식당 한구석에 돌아 앉아 외톨박이로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염색한 머리 밑으로는 하얀 뿌리가 듬성듬성 솟아오르고 빛바랜 카키색 코트가 기름때에 절어 있는 뒷모습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중년가장의 고달픈 흔적마저 엿보인다.
그러나 중년가장의 늦은 점심보다 더 가슴 아프고 슬픈 풍경은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을 잡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다 뒤늦게 음식점을 찾아드는 청년 실업자들이다. 그들은 아마도 하루 종일 이력서 들고 이 회사 저 회사를 기웃거리거나 길거리에서 손님을 부르는 가두판매 등으로 밥 때를 놓친 사람들일 것이다. 그보다 더 쓸쓸하고 슬픈 풍경은 찾아 갈 집도, 집에 갈 차비도 없어 24시간 영업 패스트푸드 점에서 음료수 한잔으로 추위도 피할 겸 밤을 지새는 이른바 ‘햄버거 난민’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우리’라는 공동체에 끼이지 못한 ‘외톨박이’들이다. 취직을 못했으니 밥이나 차를 같이 할 회사동료가 있을 리 없다. 같이 밥 먹고 차 한잔을 함께할 ‘우리’가 없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올해에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밥 때를 놓친 청년 실업자나 패스트푸드 점에서 날밤을 새는 젊은이들, ‘우리’가 무너진 이 시대의 슬픈 풍경화가 아닌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