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고운의 지팡이가 천년고목으로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이런 신격화가 있나 싶었는데 그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이상한 이야기가 지금은 왜 이상하지 않고 그냥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을까?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고운이 나무처럼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잘나가는 사내였다. 유학 시절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칠 정도였으니. 화려한 유학을 다녀왔고 진성여왕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중앙 귀족의 반발과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민란을 어쩌지 못해 여왕이 물러나자 그도 물러나야 했다. 꽃길만 걷던 그에게 얼마나 치욕이었을까? 그는 정처 없이 유랑했다고 전한다. 그건 세상과의 단절이기도 했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이기도 했겠다.
자신이 감내해야 할 생의 무게를 버거워하며 번잡한 생에 대해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고독한 유랑의 길 위에 있었던 그는 생의 마지막에 마침내 인적 드문 가야산에 들었다. 그쯤 그는 세상사를 툭툭 털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마침내 그는 거기에다 유랑생활을 함께 했을 지팡이를 꽂았다. 마치 죽을 자리를 찾은 것처럼. 그런데 거기, 그와 함께 헤매며 방황하며 그의 무게를 지탱해준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솟은 것이다. 그의 유랑이, 그의 고독이, 그의 삶이 진짜였음을 증언하듯이.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나무는 긴긴 세월 비바람에 흔들려야 한다. 그런 세월이 품고 있어야 마침내 기꺼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 나무는 고사목으로 또 산다. 고사목은 아무 역할도 없이 흉물스럽게 서있는 것이 아니다. 종종 딱따구리는 고사목에 둥지를 튼다. 늙어 탄력을 잃은 나무라야 부리로 파내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사목이 보기 싫다고 발로 쓰러뜨리면 새는 더 이상 그 나무엔 둥지를 틀지 않는다. 햇빛도 받기 어렵고, 다른 동물로부터 새끼를 보호할 수 없으니. 숲에 들면 찬찬히 고사목을 살펴보자. 언뜻 보면 추한 나무일지 모르나 자세히 보면 시선 자체가 바뀐다.
젊은 나무, 쑥쑥 자라는 나무는 방어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에 벌레들이 마음 놓고 살 수가 없다. 그러나 버섯과 이끼들이 좋아하는 고사목은 벌레들의 세상이다. 주검 자체도 생명들의 거름이 되고 보금자리가 되고 세계가 되는 고사목은 숲에 사는 생명들에게 아낌없이 자기를 내주는 숲의 자궁인 것이다.
함부로 고사목을 쓰러뜨리거나 베어내는 행위는 숲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행위다. 건강한 숲에는 고사목이 있듯, 건강한 사회엔 세상사 툭툭 털고 기꺼이 사라질 수 있는 최치원과 같은 인물들이 있어야 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