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상 | ||
실물경제가 침체된 상태에서 증권과 부동산 가격이 뛰는 것은 경제에 제로섬(영합)게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즉 국민의 소득증가가 없는 상태에서 일부 계층의 소득이 다른 계층으로 강제 이전되는 일종의 도박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이 제로섬게임은 누가 벌이는 것인가? 최근 국제금융시장이 안정세를 보이자 우리나라 증권과 부동산시장에서 빠져 나가던 외국자본이 되돌아오고 있다. 금년 들어 주식 순매수만 7조원에 이를 정도다. 여기에 국내 금융시장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800조 원 이상의 부동자금이 증권과 부동산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결국 국내외 대형자본이 폭리를 취하기 위해 가격이 폭락한 증권과 부동산시장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증권과 부동산시장의 활황세를 이용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갖가지 투자전략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투기게임에서 피해를 보는 패자는 당연히 일반 국민들이다. 우선 대다수의 개인 투자자들은 그동안 쌓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계속 투자를 연장하거나 투자금액을 늘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으로 정보부재와 전략부족으로 다시 패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 문제는 대부분 국민이 간접적인 패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선 소비자들은 투기자금이 과잉유동성을 유발하여 물가를 자극할 때 구매력을 상실한다. 그렇지 않아도 수입물가가 올라 생활고가 큰 서민들은 죄 없이 손해를 본다. 더욱이 집이 없는 서민들은 값이 다시 올라 집 사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내집 마련의 꿈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한편 누구보다도 피해가 큰 패자들은 일을 하는 근로자들이다. 투기거품이 꺼져 증권과 부동산 시장이 다시 곤두박질칠 경우 자금흐름이 막혀 산업와해와 기업부도가 연쇄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우 수많은 근로자들이 실업자로 전락하여 생계수단을 잃는다.
물론 최근의 증권과 부동산 가격 상승은 소비와 기업투자를 활성화하여 경제를 살리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외교역의존도가 80%가 넘는 우리 경제는 외적으로 수출이 급감하고 내적으로 부실이 확대되고 있어 이러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 결국 이번 경기 회복은 국민들을 슬픈 사람들로 만드는 투기의 회복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정부가 재정지출을 대규모로 확대하고 건설공사를 전국적으로 펴는 정책은 결국 투기를 활성화하여 슬픈 사람들을 양산하는 재앙을 낳는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정부가 근본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은 단순한 경기부양 정책이 아니라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기업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산업을 발굴하여 시중 자금이 산업투자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국내 산업자본을 육성하여 금융시장의 해외의존을 탈피하고 중소기업과 내수산업을 획기적으로 일으켜 경제의 자립도와 고용창출능력을 높이는 정책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
고려대 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