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피에타는 슬픔, 그것도 경건한 슬픔이라는 뜻이다. 슬픔이 경건하다니?! 순수하고 지극한 슬픔이 경건한 슬픔이다. 분노도 섞이지 않고, 기대나 요구도 섞이지 않고, 불안도 섞이지 않고, 두려움도 섞이지 않는 망연한 슬픔이 순수한 슬픔이다. 그것은 질식할 것 같은 슬픔 속에서 내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달라고 절규한 후에, 억울한데 무력하다고 호소한 후에 눈물마저 마른 뒤에 남은 그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거기서 나는 현대미술의 힘을 보았다. 왜 사진과 비디오와 설치가 현대미술의 주류가 되었는지 짐작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극한 슬픔을 안고 간 나를 위로한 것은 로마였다. 마치 나를 위해 기도하는 공간으로 비워둔 것 같은 로마의 성당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로마에는 정말 성당들이 많다. 대부분의 성당들은 사람들이 찾지 않아 대체로 조용한 데, 성 베드로 성당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수많은 인파속에서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피에타 속 마리아는 슬픔 속에서 고요했다. 세상에,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그것도 정신적 지주였던 아들을!
주님,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마리아는 아들의 안위를 위해 얼마나 지극하게 기도했을까. 그러나 신마저 외면하여 주검으로 남은 아들을 받아 안았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저 절절한 아들의 마지막 기도가 평생 기도가 된 여인의 모습이었다. 상실감을 너무 커서 모든 것을 버리고서야 견딜 수 있었던 여인! 피에타의 매력은 그 여인이 일군 고요한 평화였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고통엔 뜻이 있다고 한다. 글쎄, 그렇게 쉬운 얘기는 아닐 것이다. 시련으로 거칠어지고 고통 때문에 절망으로 빠져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고통 뒤에 평화를 일군 사람은 더 자연스럽다. 지극한 슬픔 뒤에 나타나는 성모의 온화한 표정은 그것이 만든 것이었다. 그 온화함이 나를 사로잡고 우리를 사로잡아 슬픔에 질식할 것 같은 우리를 붙드는 것이다.
나는, 평범한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딸이 성모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평범한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아들이 예수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부자가 되기를!
부모도 바라지 않는 길, 그 고독의 길 위에서 그녀를 지탱시켰던 아들 예수마저 죽은 뒤, 그 주검을 안고서야 성모가 된 여인 앞에서 슬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성모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뭔가 하고.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