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한 신문사가 주최하는 논픽션 공모의 심사위원을 했다. “사실이 힘이다, 당신의 이야기로 도전하라!”는 카피 아래 얼마나 많은 인생들의 이야기가 모였는지. 어렵고 아프고 고독했던 시절을 건너온 인생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구나 운명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생의 존재 이유는 안간힘으로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 그 시절을 거두어 소화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당신은 누구에게, 혹은 중요한 무엇에게 버림당해 본 적이 있는가? 최근 보건복지가족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혼을 했거나 사별한 사람의 자살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4배 이상 높다고 한다. 버려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버릴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사실 ‘버려짐’은 인간이 통과해야 할 중요한 통과의례다. 성서에는 버려진 여자의 원형이 나온다. 바로 하갈이다. 그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이스마엘을 낳았으나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 의해 광야로 쫓겨 가야 했던 여자다. 얼마나 모욕적이었을까? 아니, 자존심 싸움이 사치일 정도로 생존을 위해 이를 깨물어야 했던 그 여자 하갈은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게다가 사막 한가운데서 가죽부대에 담아가지고 나온 그 알량한 물이 떨어졌는데. 성서는 천사가 하갈과 이스마엘의 울부짖음을 듣고 눈을 열어주어 우물을 보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 우물이야말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샘인 거라고. 하갈이 내면의 생명샘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는 누구에게서도 버림받을 수 없는 여신인 거라고. 물은 생명이고 치유다. 그러므로 물은 신이다. 마음속에서 샘물을 발견한 자는 버려졌더라도 버려지지 않는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을 회복해가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 하갈과 함께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생사를 건 투쟁을 했던 이스마엘은 13억 무슬림들의 뿌리다. 내가 놀라는 것은 무슬림들이 평생에 한 번은 꼭 가야 하고, 가기를 원하는 성지 중의 성지 메카가 하갈과 이스마엘이 살던 곳이라는 것이다. 메카의 카바 신전은 원래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살아있음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바치는 성전터였다는 것도! 잊은 줄 알았던 그 땅에서 수천 년이 지나고 무하마드가 나고, 거기 히라 동굴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가 시작되는 것도 우연인 것 같지 않다.
세상에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운명은 잊지 않고 그 때 그 상황이 심은 씨의 싹을 틔운다. 그 때 그 하갈이 아브라함가(家)에서 버려졌다고 스스로를 버렸다면 이스마엘이 살고 무하마드가 나왔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속에는 긴긴 세월을 살아온 조상들이 있고 긴긴 세월을 살아갈 후손들이 있다. 함부로 살 수 없는 이유다. 쉽게 절망할 수 없는 이유다.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