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공공형사수사부에 삼성그룹의 노조와해 의혹 사건이 배당돼 있기 때문”이라고 재배당 이유를 밝혔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법조인은 없다. 오히려 검찰이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의혹을 파헤쳤던 최강화력 특수1부를 동원해, 법원행정처에 대한 의혹을 샅샅이 살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힘을 받는다. 특히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경우 피의자 신분 소환조사는 당연하고, 구속영장 청구도 피하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 김명수 대법원장의 실수?
그동안 검찰은 시민사회단체 등으로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수사해 달라는 10여 건의 고발장을 접수했으나, 쉽사리 수사에 착수하지 못했다. 검찰이 수사한 사건을 재판하는 법원을 상대로 검찰이 수사를 벌인 적이 한 차례도 없을 뿐더러, 영장 등을 발부받는 법원에 대한 수사를 검찰만의 판단으로 착수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검찰은 그동안 “법원이 스스로 고발하지 않으면 수사할 수 없다”는 자세를 취해왔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출근길,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 15일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난 15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선택’ 덕분에 검찰은 본격 수사 카드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김 대법원장은 “대법원이 고발하지는 않지만,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 검찰은 바로 사건을 재배당한 뒤 곧바로 대법원에 의혹 문건 등이 담긴 ‘법원행정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당초 법원이 3차례 자체 조사단(TF)에서 살펴봤던 것보다 넓은 범위의 자료를 요구한 것이라 법원은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법원은 추가조사단(2차 TF)과 특별조사단(3차 TF) 때 4대의 법원행정처 컴퓨터에서 발견된 400여 건의 문건 중 키워드를 검색하는 방식으로 조사 대상을 선정했는데, 이때 추려진 문건은 대략 50여 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검찰은 해당 문건뿐 아니라 PC 자체를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특히 법원이 살펴본 4대 외에 추가 PC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판사들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한 고위 법관은 “50여 건의 문건 공개를 놓고도 의견이 나뉘었는데, 검찰의 요구를 받아들여 줄 경우 법원 내 주요 의사 결정 과정이 고스란히 다 외부에 노출되게 된다”며 “국회 측의 요구들이 담긴 문건들이 검찰 손에 들어갈 경우 청와대 재판 거래뿐 아니라, 국회와의 재판 거래 의혹까지 확산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는 검찰로서는 당연한 요구다. 검찰 관계자는 “원래 특수 수사는 해당 의혹은 기본으로 확인하고, 그 외에 추가로 들여다 볼 여지도 찾는 게 당연한 흐름”이라며 “법원이 보라는 것만 수사할 것이었다면 굳이 특수1부에 재배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법원은 자체 조사 당시 ‘강제 개봉’ 논란까지 일었던 민감한 PC 내 모든 자료들을 검찰에 넘겨줄지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 법원 ‘고민’에도 검찰 “칼 뽑았으니 갈 길 간다”
법원은 난감한 상황에 빠졌지만 검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건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이는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사법연수원 27기).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기소하는 성과를 올린 한동훈 3차장검사는 전직 사법부 수장들을 겨냥한 수사에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사건 재배당 과정에서 한동훈 차장이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는 얘기가 있다”며 “특수 수사에 탁월한 만큼 단단하게 수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민단체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고발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본격적인 소환 조사도 시작한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시민단체 등 고발인 조사부터 착수했다. 수사팀은 21일 오전 10시,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인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본격 수사에 앞서 고발인 차원으로 조사했다. 임 교수가 속한 참여연대 등 10여 곳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임종헌 전 차장,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등은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고발했는데 고발인 조사는 수사 착수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 임종헌 구속, 양승태 소환 시나리오까지
수사는 크게 재판거래 의혹과 법관 불법 사찰 의혹, 두 갈래로 진행될 전망이다. 그동안 공개된 법원행정처 문건에서 양승태 전 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하는 판사들의 활동과 재산 내역 등까지 사찰하고 반대 의견 표출을 억누르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또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댓글 사건과 같이 박근혜 정부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사건 진행 과정과 선고 후 청와대 반응도 긴밀하게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16년 국회에 참석해 답변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대법관 13명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협조” 발표 후 “부적절한 재판 거래 및 개입은 없었다”는 입장을 냈지만, 검찰은 “그런 내용들까지도 하나하나 직접 다 확인하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최우선 수사 대상은 최근 김명수 대법원장이 징계절차에 들어갔다고 밝힌 고등법원 부장판사 4명을 포함해 법원행정처를 거친 13명의 현직 판사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경우 수사 진행상황에 따라 구속영장이 청구될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받고 있다.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이뤄진 일련의 의혹들의 정점에 임 전 차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피의자 포토라인에 세우기 위해서는 임 전 차장뿐 아니라, 박병대 전 대법관(당시 법원행정처장)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수사 진행 과정에 따라서는 다수의 전·현직 대법관들이 검찰의 칼날 앞에 설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받는다.
영장 청구 단계에서 법원이 법원에 대해 관대한 판단(구속영장 기각)을 하기 힘든 구조도, 검찰이 적극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법원 고위 관계자는 “보통 사건과 달리, 이번 사건은 법원 내부 의사 과정에서 드러난 불법적 요소에 대한 수사”라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대법원장이 밝혔으니 법원 영장전담재판부가 영장 발부 과정에서 딴지를 걸기 쉽지 않을 것이고, 검찰은 이를 적극 활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국법원장 회의 등에서 “문제는 있지만 직권 남용 등 형사 처벌 대상은 아니”라는 결론이 지배적이었던 탓에, 검찰이 임 전 차장 등에 대해 영장을 청구하더라도 기각될 것이라는 의견 또한 법조계 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구속영장 청구는 수사 과정에서 죄를 더 밝혀내기 위해 하는 것이지 유무죄를 판단받는 게 아니다. 검찰이 임 전 차장 등에 대해 영장을 청구했는데 법원이 이를 기각할 경우 ‘제 식구 감싸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앞선 법원 관계자 역시 “법원이 몇몇 영장을 다른 사건의 기준에 맞춰 기각했다고 하더라도 검찰이 외부적으로 ‘법원이 스스로 봐주기를 한다’고 언론에 알릴 경우 법원은 할 수 있는 변명이 없다”고 덧붙였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