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에 태어나 웨일즈 대학에서 정치사를 전공하던 리치 에드워즈는 1986년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정식 멤버 이전에 로드 매니저였고 이후 대변인 역할을 하다가 기타리스트로서 네 번째 멤버가 되었다. 전혀 기타를 칠 줄 몰랐지만 멤버 중 한 명인 니키 와이어에게 배운 후 3집 ‘더 홀리 바이블’ 때부터 기타리스트로 합류했다. 연주 실력은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가 쓴 가사는 밴드의 음악에 독특한 감성을 불어넣었다.
가끔은 돌발적인 행동으로 팬들마저 놀라게 했지만, 그는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안타까운 건 스타덤에 오른 부담감으로 정신적 피로를 겪었고, 그 결과 알코올과 약물에 의지하곤 했다는 것. 1994년엔 결국 클리닉에 들어가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다시 추스르고 3집 앨범 작업에 임했으며, 1995년엔 앨범 프로모션을 위한 미국 투어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팝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난다. 2월 1일 아침 7시. 영국 남서부에 있는 항구 도시 뉴포트의 킹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리치 에드워즈는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미국 투어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어난 황당한 일이었다.
이전의 행적은 심상치 않았다. 실종 2주 전부터 그는 매일 200파운드(약 30만 원)의 돈을 인출했다. 은밀히 계획한 여행 자금이었을까? 실종 당시엔 2800파운드(약 400만 원)의 돈이 그의 수중에 있던 걸로 추정되었다. 자신의 아파트에 놓을 새 책상을 주문했는데, 대금을 지불하진 않았다. 저널리스트인 엠마 포레스트의 기사에 의하면, 사라지기 전날 리치 에드워즈는 친구 한 명을 만나 ‘노블 위드 코카인’이라는 러시아 소설을 선물하며 책의 머리말 부분을 꼭 읽어 보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거기에선 정신병원에 있는 작중 화자가 실종되기 직전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이상한 행동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뉴포트에 오기 전에 런던의 엠버시 호텔에 묵었는데, 이때 자신의 가방에 있던 책이나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버렸는데, 그 방식이 조금은 독특했다. 버릴 물건을 정성스럽게 포장한 후 박스에 넣고, 거기에 편지를 넣었다. 수신인은 ‘조’라는 사람.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사랑해.”(I Love You)가 전부였다. 그리고 박스는 마치 생일선물처럼 화려하게 포장된 후에 버려졌다.
실종된 지 2주가 된 2월 15일, 에드워즈의 복스홀 캐벌리어 자동차는 서번 뷰 지역의 주차장에서 발견되었다. 배터리는 나간 상태였고, 그곳에서 1주일 정도 머문 듯한 흔적이 있었다. 인근엔 서번 브리지가 있었는데, 이곳은 투신자살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경찰은 자살이 사인이라고 추정했지만, 에드워즈의 지인들은 믿지 않았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 1994년에 한 인터뷰에서 리치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자살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시도조차 없을 것이다. 난 멘탈이 강하다. 난 삶의 고통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그런데 이후 끊임없이 리치 에드워즈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2년 후인 1997년 3월, 인도의 고아 지역 리조트에서 그를 봤다는 팬이 있었다. 경찰 조사가 들어가진 않았다. 1998년엔 스페인의 푸에르테벤투라 지역 어느 섬에 있는 ‘언더그라운드’라는 바에서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에드워즈의 부모가 가봤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이후에도 아프리카 지역의 카나리아 군도, 뉴포트 도서관 등 각지에서 제보가 있었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2002년 2월까지 찾지 못하면 사망으로 간주되는 법적 상황이었지만, 에드워즈의 부모는 거부했다. 이때 서번 강둑에서 사람의 뼈가 들어 있는 운동화 한 켤레가 발견되었지만, 조사 결과 에드워즈의 것은 아니었다. 결국 2008년, 리치 에드워즈가 사라진 지 13년 만에 사망한 것으로 법적 추정이 되었다. 에드워즈를 잊지 못하는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멤버들은 아직도 공연을 할 때 그가 기타를 연주하던 자리를 비워놓는다고. 공연 수익의 경우 그의 몫을 유족들에게 전달한다고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