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15일 ‘혁신성장 규제 개혁 과제’를 기획재정부에 건의했다고 밝혔다. 이날 경총이 건의한 9개 과제 가운데는 보건의료 분야에 대한 정책 제언이 3개나 포함됐다. 사진=경총 제공
지난 19일 윤소하 정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의원총회에서 “(경총의 주장은) 의료분야마저 무한대의 돈벌이를 추구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며 “(대기업 자본은) 이미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부터 끊임없이 영리병원 허용을 주장해왔고, 의료법 통과가 부결되자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나 규제프리존법 등을 통해 의료영리화를 추진해왔다”고 밝혔다. 또 양대 노총과 전국 시민단체 연대기구인 무상의료운동본부도 지난 18일 성명을 내고 “원격의료와 영리병원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대표적 의료 민영화, 영리화 사안”이라며 “2014년 2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의료 민영화 반대 서명에 참여할 정도로 반대의사가 확고함을 (정부는)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경총은 의료산업에 대한 규제 개혁이 이뤄질 경우 최소 18만 7000개, 최대 37만 4000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경총 주장의 핵심은 의료인이 아닌 기업가도 병원을 설립해 수익을 낼 수 있도록 의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인 또는 의료법인에만 병원 설립과 경영을 허용하고 있다. 또 경총은 이해당사자 간 갈등으로 추진이 지연되는 사안에 대해선 정부가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즉 정부 주도로 의료영리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총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영리병원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우리는 신규 병원이 설립되면 그만큼 일자리가 늘고, 관련 산업이 발전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료영리화는 재계의 오랜 숙원사업 중 하나다. 재계는 2000년대 중반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중심으로 꾸준히 의료사업 진출을 노려왔다. 특히 전경련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래 거의 매년 의료영리화를 요구했다. 2016년에는 국내 의료시스템을 ‘7대 갈라파고스’로 꼽고 영리병원 도입을 통해 26만 9000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한국경제연구원 역시 정책연구(투자개방형 의료법인의 도입 필요성과 국민경제 효과 분석)를 통해 영리병원 도입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재계가 추산한 일자리 창출 효과와 그 근거에 대해선 의문이 따라 붙는다. 영리병원 도입이 고용 증가로 이어진 선례를 세계적으로 찾기 어려울뿐더러 유발경제효과와 관련해서도 긍정적 측면만 부각해 기대치를 부풀렸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또 장기적으로 공공병원 일자리 감소 등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우리 협회는 원격의료 및 영리병원 도입을 반대해왔다”며 “병원이 영리를 추구하면 장기적으로 의료 행위의 본질이 왜곡돼 공공의료시스템이 붕괴될 뿐 아니라 국민건강에 위해를 가하게 된다”며 “대기업 자본이 유통업을 장악하자 대형마트가 생기고 일자리도 생겼지만 반대로 자영업자는 대부분 망하지 않았느냐”라고 설명했다. 김재헌 무상의료운동본부 사무국장도 “보건의료를 산업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지금도 대형병원의 과도한 수익 추구가 여러 문제를 낳고 있는데 영리병원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19일 국회를 찾은 손경식 경총 신임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재계 안팎에선 사회적 논란이 큰 의료민영화 이슈를 경총이 급작스레 꺼낸 배경을 놓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최근 경총은 노무현 정부 관료 출신인 송영중 경총 상임부회장의 거취 문제로 한 달 가까이 내홍을 겪고 있다. 지난 4월 경총 신임 부회장으로 선임된 송 부회장은 최저임금 협상 과정에서 양대노총과 함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하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한 임원은 “취임 당시부터 현대차 등 대기업이 친(親)노동 성향을 이유로 송 부회장을 반대한 것으로 안다”며 “아무래도 회원사인 사용자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데 노동자 또는 정부 편을 들 수 있다는 것이 결국 문제가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6월 들어 경총은 회장단 회의를 통해 송 부회장을 직무정지 처분하고 자진사퇴를 권고했다. 그러나 송 부회장은 자진사퇴를 거부한 채 재택근무를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0일 경총은 또 다시 송 부회장의 자진사퇴를 압박했다. 경총 관계자는 “사퇴 길을 열었는데 안 되면 7월 총회를 통해 해임하는 방법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경총 내부에선 그간 송 부회장이 조직을 무시하는 등의 태도로 회장단 눈 밖에 났지만 쉽사리 해임하지 못한 배경에 청와대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무성했다. 송 부회장은 노무현 정부 때 노동부 고용정책본부장 등을 지냈다.
손경식 경총 회장 역시 송 부회장을 사실상 비호했다는 말이 나온다. 손 회장은 지난 3월 취임사에서 ‘일자리 창출’을 언급하며 정부 정책과 보조를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일부 회원사를 중심으로 경총 회장의 취임사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반응이 있었다”고 말했다. 경총은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반성하라”는 비판을 받은 데 이어 올해엔 삼성전자 노조 와해 사건에 연루되며 압수수색을 받았다. 앞의 재계 임원은 “경총도 살아남으려면 당분간 정부에 협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경총의 의료 분야 규제 개혁 제언의 방점은 일자리 창출에 찍힌다. 경총 관계자는 “정부와 따로 교감한 건 아니지만 기획재정부 주도로 규제 혁신 관련 논의가 정부 차원에서 이뤄지는 중인데 우리 쪽 의견을 물어와 그대로 답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원격의료 규제 완화 가능성을 언급하며 의료영리화 논란을 키웠다. 무상의료운동본부 등 의료영리화 반대 진영에선 저조한 일자리 실적과 미국발 금리 인상 등에 따른 경제 위기를 명분으로 문재인 정부가 의료 분야에 대한 규제 완화를 강행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당시 의료영리화 반대를 공약으로 채택했다.
수면 아래 있던 의료영리화 논란은 경총 발표를 기점으로 군불을 땠다. 현 여당은 노동계가 불참한 가운데 경총 협조를 받고 최저임금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공교롭게도 정부는 지난 20일 경총이 요구한 ‘근로시간단축 6개월 계도기간’을 수용했다. 여당 한 인사는 “하반기부터는 국정 운영에서 경제 문제를 최우선에 둘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