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가 영화 ‘허스토리’로 돌아왔다.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는 그를 영화 개봉 전 만났다. 새 영화 이야기부터 연기자로 살아온 35년의 시간까지 담담하게 풀어낸 김희애는 몇 번이나 “아들 둘을 키운 엄마”라는 말을 내놨다. 그러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야 좋은 연기도 할 수 있다”는 신념도 내비쳤다.
사진= YG엔터테인먼트
“제가 데뷔한 무렵에는 연예계 환경이 너무 열악했어요. 사회적으로도 연예인을 ‘딴따라’로 보는 시선도 있었고. 힘들게 활동하면서 어릴 땐 ‘인생은 이렇게 어두운 건가’ 싶었죠. 나는 언제쯤 이 일을 관둘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지배했다고 할까. 그래도 견뎠어요. 결혼하고 난 뒤에도 남들은 하지 않을 법한 강하고 센 역할을 거부하지 않았고요.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합리적이고 밝은 세상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해요.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이 올 테니까. 하하!”
대중의 시선을 받는 스타이지만 김희애도 일상에서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다. 일은 물론 가정도 탄탄하게 꾸려온 그를 ‘롤모델’로 삼은 후배 배우들도 여럿이다. 배우인 동시에 생활인으로서의 저력도 상당하다.
그렇게 키운 맏아들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고, 둘째는 대학 진학을 앞뒀다. 두 아들은 TV에 김희애가 나올 때면 여전히 ‘우리 엄마가 왜 나오지’라며 신기해하고 있다. 엄마의 직업이 배우라는 사실이 지금도 낯선 탓이다. 때문에 김희애의 두 아들은 엄마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도 잘 챙겨보지 않는다고 했다.
김희애도 마찬가지.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가족과 함께 보는 일은 절대 없다는 그는 “TV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게 너무 어색해 보지 못하겠다”며 “그래도 작품 모니터는 해야 하니까 혼자 방에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 본다”고 했다.
“아이들이 내 작품을 보지 않는 게 오히려 편해요. 저도 비슷하니까. 그런데 한 번씩 엄청 섭섭하더라고요. 가끔 아들들에게 ‘너희는 엄마한테 너무 관심 없는 것 아냐’ 묻기도 하는데 달라지지 않아요. 사실 남편도 비슷하거든요. 한 번은 남편의 페이스북에 친구신청을 했더니, 위축되니까 SNS에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런 김희애는 “배우는 가장 평범한 일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가장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가치관은 지금껏 그를 받친 원동력이다. 바쁜 연예계 생활 가운데서도 조용하게 두 아들을 키워낸 그는 “배우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진짜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며 “그러니 늘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조심하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사진제공 = YG엔터테인먼트
“결혼했다고 해서, 또 누군가의 엄마라는 사실 때문에 작품이나 역할을 거부하지 않았어요. 조금 불편하게 보일 수 있는 강한 역할도 해왔고요. 멈추지 않았기에 지금 ‘허스토리’ 같은 영화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영화에서 제가 맡은 문정숙이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열매를 맺은 거잖아요. 연기에서도 삶에서도 마음을 열어뒀으니까 가능한 일이죠.”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6년간 일본군 전쟁 피해여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인 관부재판 실화를 다룬다.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이란 인물의 실제 모델은 당시 모든 재산을 털어 피해 할머니들을 도운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이다. 김희애는 김 회장이 한창 활동하던 당시 사진들을 구해 외모와 의상까지 그대로 따랐다. “스타일링이라기보다 고증에 가까웠다”고 했다.
“영화를 마치고 나니 큰 강을 건넌 기분이에요.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분장실로 들어가 문 잠그고 눈물을 쏟아냈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연기자로 오래 살았으니 어지간한 일에는 끄덕하지 않아요. 다만 내가 영화를 찍으며 느낀 한 인간의 승리와 용기, 통쾌함이 관객에 전달되길 바라고 있어요.”
영화로만 본다면 김희애는 그간 정적인 인물을 주로 소화해왔다. 이번 영화에선 앞선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부산에서 성공한 여행사 대표라는 설정의 영향도 있지만 ‘일본에게 꼭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결심 아래 피해 할머니들을 연대시키는 모습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우아한 김희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강한 면모를 과시한다. 걸크러시의 매력도 상당하다. 이미지 변신에도 성공했다.
“걸크러시? 하하! 아들 둘을 키워보세요. 걸크러시가 아주 익숙합니다. 아들 둘 키우는 일이 배우 생활에 엄청난 시너지를 주거든요. 아직 하고 싶은 연기도 많아요. 얼마 전에 ‘쓰리 빌보드’라는 영화를 봤는데 비열하면서도 소심한 경찰관을 연기한 샘 록웰에 완전히 반했어요. 어쩜 그렇게 세련된 연기를 할 수 있죠. 아주 큰 자극이 됐어요. 꼭 만나고 싶어요. 하하!”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